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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미셸 Michelle May 21. 2019

세상 위, 다음 목적지를 향해

190521

    지난 일요일, 핸드폰을 잃어 버렸다. 다른 때보다 정신이 없긴 했다. 


    학원 지각 위기였는데, 뇌가 깨지 않은 걸 알아 커피는 또 사들고 가야했다. 학원을 향하고 있는데 저녁 늦게까지 컴퓨터 한다고 노트북 충전을 덜 한 사실도 깨달았다ㅋㅋㅋㅋㅋ젠장, 컴퓨터 수업인데! 허둥지둥 도착한 카페에서 잠시 동안만이라도 부리나케 충전을 한다고 부시럭 댔다. 


    커피를 받아서 올라가보니 막 수업은 시작한 상태였고 자리에 앉다가 들고온 커피도 쏟았다. 환-상적인 하루였다. 다행히 옆 분께 많이 튀지는 않았고, 조교님들 덕분에 쏟은 커피도 빛의 속도로 깨끗이 치웠다. 그렇게 수업을 시작했는데 수업 중반부로 갈수록 뭔가 낌새가 이상한 거다. 이렇게 허전할 리가 없는데...? 폰이 없어! 가방도 다 뒤졌다. 폰이 없다니! ㅋㅋㅋㅋㅋ 웃음 밖에 안 나왔다.


    전화를 해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 때는 일요일이었고, 전화로 보험 확인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속상하고 불안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후련했다. 3년 반이 넘게 써오던 폰이였다. 게다가 계속 바꿔야지 바꿔야지 생각하던 폰이었는데 못 바꾸고 있던 녀석이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누가 갖다 버려주지 않았더라면 내 손으로는 못 버릴 녀석이었겠다는 생각까지 갔다. 잃어버리길 잘 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차피 내용물들은 클라우드로 모두 연동해 두어 손해는 없었다.) 집에 돌아와 나도 모르게 실실 쪼개는 모습을 보고 동생이 '최소한 슬퍼해라'고 했다. 근데 이를 어째... 슬프지 않은 걸... 그리고 그 모습이 마치 최근에 퇴사 결정을 내린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냥 다녔더라면 1년을 채웠을 회사였다. 최근 들어 마음이 맞는 동료분들도 생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사람을 계속 일하게 하는 내적인 동기는 즐거움, 의미, 성장 세 가지라는데 그 어느 것도 느낄 수 없었다. 3개월 시점에서 이미 한 번 고민을 했었지만, 또 다시 반 년이 지나도 제자리인 모습에 결정을 내렸다. 누군가 그랬다. 인생은 A/B 테스팅이라고. 동료들은 지금 그만두는 게 불안하지 않냐,고 걱정했지만 반 년이 넘는 시간을 속상해 하며 보냈기에 내 기분은 오히려 홀가분에 가까웠다. 끝이 안 보이는 길에 서 있는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끝이 없을 때 끝을 직접 내지 않으면 정말 원하는 끝은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래서 지금의 내 상태는 자발적 백수다. 사실 변화가 많지는 않다. 아침에 좀더 늦게까지 침대 속에 있고, 직접 등록한 데이터 사이언스 학원에 가고, 면접을 보러 다니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글을 쓴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고 계획을 세우며 다시 그 날의 일과에 몰입한다. 하지만 이 소소한 결정들의 감사함을 느끼지 못한 채 기계처럼 일했던 게 지난 날들이었다면, 다시 한 번 도약을 위해 반보 뒤로 웅크리기를 한 게 오늘날이다.


    학기 중에 많은 분들을 인터뷰하고 다니고, 세상은 돌아다니면서 분명 나는 나를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회사를 접할 때까지, 나는 허둥지둥 내가 무엇을 정말 원하는지, 뭘 잘 하는지, 혹은 좋아하는지 머리로만 알고 마음으로 알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를 충전할 줄도 몰랐고, 커피 같은 준비물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으며, 챙겼더라도 허둥대는 마음에 와르르 쏟아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지금의 타이밍에라도 쉬어 가지 않는다면, 내가 힘겨워하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분명 왜 그 때 결정을 더 빨리 내리지 못했을까 나를 원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또 친한 동생이 그랬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까지 배 위에서 보낸 시간이 얼만지 알아요?
60일이래요, 60일.

    말이 쉬워 60일이지, 두 달이라는 시간을 출렁이는 물결 외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 그 막막함이 어땠을까. 오로지 '신대륙'이라는 신기루만을 가지고 항해하기가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게다가 콜럼버스는 식솔들이 있을 90명의 선원들의 목숨까지도 책임져야 했으며, 신대륙을 약속드린 여왕의 후원도 있었다. 감히 그 막막함과 두려움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어렴풋이 그의 심정을 떠올려 보자면, 그래도 그는 바다에도 끝이 있음을 알았다. 언젠가는 정착하리라는 것을 믿었고, 결국 삶도 더 나은 무언가를 향해 떠나는 여정임을 믿었기에 나아갔을 것이다.


    물론 나는 신대륙을 찾을 마음도, 배짱도 없고, 함께 하는 선원 없이 홀홀단신이다. 하지만 하나, 콜럼버스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면, 이 길도 곧 내 성장의 길임을 나는 안다는 것. 어렵다면 어려운 길일 수도 있고, 말이 안 된다면 말이 안 되는 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그 선택을 내린 게 나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그리고 때로 덜렁대고 부족하지만 나는 결국 해낼 줄 아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믿어보기로 한다.



점. 그래, 나는 세상의 작은 점이다!


    세상 위, 어느 점이더라도. 나라는 점은 꽤 강한 녀석이니까.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어본다. 아니, 솔직히 잘은 모르겠지만, 즐겁게. 그렇게 바다 위 정착지를 찾는 마음으로 살아 나갈 테다. 이제 나는 '나'라는 등대를 품었으니까.



PS. 퇴사 날 기뻐해준 동료들과 기쁜 입사의 소식을 들려준 친한 후배를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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