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추석 문화가 바뀌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 지 꽤 오래된 듯하다. 하지만 가족의 고유한 문화는 잘 바뀌지 않아아직도 전을 산처럼 부치고 남은 음식을 어찌 처치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집도 상당해 보인다. 그럴 거라면, 간단하게 집에서 한 끼 먹고 여행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힐링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서로의 근황을 조금은 더 너그럽게 물어봐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여행의 시작
이번 추석은 친정 가족들과 짧은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동생은 우리 집에서 여행 담당, 외식 담당, 새로운 것 도전 담당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여행이 내가 위에서 나열한 것처럼 마냥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녀가 말하는 여행은 준비부터 치열하고 고되며 여행을 할 때는 피곤해 죽을 지경이 당연한 것, 그것이 여행이라고 한다. 그녀는 여행을 그래서 한단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일상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된다고. 이런, 웃자고 하는 말이야, 진심이야? 물론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녀는 우리 집 종달새 담당, 개그 담당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이번 여행을 위해 단톡 방에 올라온 설문지는 여행지 선정이었다.
여행 담당자 S양의 카톡 설문조사
그리고 각 여행지의 장점과 단점, 먹거리, 볼거리를 정리해서 올렸다. 우리는 남해를 선택했다. 사실, 한 시간 반 동안 우리의 설문 참석률이 저조하자 은혜스러운 그녀는 혼자 결정을 이렇게 내려주셨다.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남해의 미국마을, 독일마을, 양 떼 목장 편백숲, 갯벌 쏙 잡기 체험, 다랭이 마을, 코나 하우스... 많은 유명 여행 장소 앞에 우리는 어디를 선택할지 난감했다. 날씨를 봐 가며 루트를 잡아보기로 했다.
추석 당일 아침, 우리는 감사 예배를 드렸다. (우리 집은 제사가 없는 집이다.) 그리고 아침을 맛있게 먹고 커피도 여유롭게 한 잔 했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의 피베리는 우리 입을 부드럽게 감쌌다.
다행히도 가는 길이 많이 막히지 않았다. 우리는 스포츠 파크가 잘 되어 있는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아이들은 놀이터와 넓은 파크를 뛰어다니며 차 안에서 이리저리 받았을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었다.
어느덧 저녁시간. 우리는 죽항 횟집을 향했다. 자연산 회를 시켰다. 농어회가 나왔다. 쫄깃쫄깃한 식감. 회를 와사비가 듬뿍 들어간 간장에 찍어 상추 위에 놓고 매운 고추를 된장에 살짝 발라 올려 쌈을 쌌다. 매운 와사비와 고추는 쫄깃한 식감을 내는 생선회와 어우러져,입 안에서 살살 녹는 회처럼 완전히 나를 녹였다. 사실 나는 회 킬러다. 1년 몇 개월여 만에 만난 자연산 회를 마주하니 살짝 눈이 뒤집혔다. 남동생과 제부는 나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다며 내가 내가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급기야 그들은 마지막 남은 회 몇 점을 나에게 양보했다. 아, 미안하게,좀 적당히 할 걸.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고 입을 싹 닦았다.그리고 매운탕이 나왔다. 많이 자극적이지 않게 잘 끓여낸 깊은 맛의 매운탕도 정말이지 맛있더라. 이런, 사진 한 장을 남기지 않았다니.
다음 날 아침, 우린 다랭이 마을로 향했다. 가는 길 바다 풍경이 멋졌다.
우리나라도 이렇게나 아름답다. 밝은 햇살이 내려 모든 곳을 비추었다.
저 바다 끝에는 내 친구들이 살고 있겠지. 그리움도 살짝이 밀려왔다.
다랭이 마을
45도 경사진 비탈 언덕에 계단식 논을 일구어 놓은, 바다와 맞닿아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름다웠고 조용했다. 박원숙 카페도 있었다.
결실의 계절 가을이 성큼 다가온 만큼 마을이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맞닿은 바다 색도 마을에 반사되었다.
바다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본 풍경. 한쪽에는 허브들을 잔뜩 심어 놓았더라. 라벤더 잎을 만지니 손에 그 향이 가득 찼다.
햇살이 강해 꽤 더웠다. 우리는 모두 우산을 양산처럼 펴들고 경사진 비탈길을 내려가 바다를 만났다.
날씨가 생각보다 더워서 갯벌 쏙 잡기 체험을 계획했던 우리는 살짝 경로를 변경했다. 그늘이 없는 뜨거운 바다 갯벌 위에서 발이 푹푹 빠지는 체험을 하기보다 양 떼 목장에 가서 양 떼도 먹이고 편백 숲 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맞아보기로 한 것. 아이들은 조금 아쉬워했지만 양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그곳으로 향했다.
남해 상상양떼목장 편백숲
목장 입구로 가기 위해 고불고불한 길을 올라서니 하늘 위로 곧게 뻗은 편백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피톤치드가 가득 한 곳에 들어서니 힐링이 자연스레 되는 듯했다.먹이를 한 통 씩 받아 들고 우리는 양들을 향했다. 그리고 녀석들과 만났다.
양떼 목장은 하늘 위 구름도 양떼 구름이었다.
아이들은 살짝 흥분했다. 풀밭위에서 이리저리 뛰어노는 양들을 보니 아니 그럴 수 있겠는가. 먹이를 한 바가지씩 들고 양들을 먹이느라 분주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어린양 한 마리가 탈출해서 울부짖었다. "매에~ 매에~" 둘째 아이는 우는 양을 따라 함께 소리를 냈다. "매에~"
탈출한 아가 양을 만져주는 S. 사진을 찍으려는데 나를 향해 와서 살짝 겁먹었다. 엄마 양과 떨어져 겁 먹은 건 너였을텐데.. 어린 아이는 널 토닥토닥..
양들은 아이들이 주는 먹이를 잘도 받아 먹었다. 어린 양들은 정말 정말 귀여웠다.
양들을 열심히 쓰다듬는 둘째 아이. 둘째야, 너도 양들이 귀엽니? 너도 딱 이만큼 귀여운데 알고 있니?
검정색 라마 한 마리가 양들 무리 중에 있었다. 얘들아, 너희들은 저 멀리 남해 바다가 내다 보이는 피톤치드 가득한 명당에 자리를 잡았구나.
그리고 우리는 새들, 햄스터, 토끼, 병아리, 기니피그 등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둘째의 동물 사랑은 계속 불타 올랐다.
아이들은 병아리를 만져보았고, 햄스터의 쳇바퀴를 돌려주었으며, 새 가면까지 써 가며 열심히 동물들과 놀았다.
양 떼 목장을 보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하기가 아쉬워 가까운 바닷가로 가서 고동과 소라, 작은 물고기, 그리고 게를 잡았다. 살아있는 게의 게딱지에 고동이 붙은 것을 보고 '먹히는 것 아닐까' 게를 걱정하는 아이의 마음이 예뻤다.나도 오랜만에 바다 체험을 하니 어릴 적 생각도 나고 재미있어서 떠나기를 재촉하는 부모님 앞에서 그냥 아이가 되어 있었다.
편백 나무들, 여유를 부리는 양 떼들, 멀리 보이는 남해의 푸른 바다, 양떼 구름을 수놓은 하늘까지 우리의 눈을 적시고 마음을 울리고 가슴에 남았다. 아이들에게는 어떤 곳이었을까. 첫째 아이는 다음에 곧 다시 오자고 했다. 이렇게 만나는 자연이 아마 좋았나 보다. '많이 보고 느끼렴. 그래서 많은 것을 담고 보듬는 그릇이 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