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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garden Oct 16. 2019

내 이름은 미스 리가 아니야

사회에 만연한 거만한 얼굴들에 대하여 1



맞다. 그는 거만한 얼굴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 벌을 주고 혼자서 점심 도시락을 펼쳤다. 그가 먹는 소리가 났다. 아이들은 더 민망했다. 뭘 잘못했는지는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그냥 허공을 울리는 소리들만 마음에 남았다. 김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거만한 얼굴이 내는 우악스러운 쩝쩝 소리가 다였다.


아이들은 배고픈 배를 참고 손을 들고 있어야 했다. 언제까지 저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할까. 벌세우고 거만한 얼굴은 밥을 먹었다. 사실 그 일을 엄마에게 말하니 엄마가 내뱉었던 말이 기억이 난다. "지는 밥 묵고, 아~들은(아이들은) 오랫동안 벌세우고, 그게 선생이 할 일이가?"


그 일이 있고나서 몇 주  거만한 얼굴은 나에게 말했다. "니 이름이 남경이가, 그럼 네 언니 이름은 북경이긋네, 흐흐흐~" 듣는 학생은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엄마에게 가서 이야기하니,  남녘 남과 북녘 북을 설명해준다. 거만한 얼굴은 계속 시골학교에 남아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담임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새학년 첫학기 첫날. 여학생 3명 정도를 불러 세웠다. 너는 미스 고, 너는 미스 리, 너는 미스 박이다. 맞다, 나는 '미스 리'였다. 그의 티 창고는 이것저것 요란한 차 박스들로 가득했다. 교실 뒤쪽 사물함 한편을 열면 그의 티 창고가 있었다. 쌍화차, 대추차, 율무차, 녹차, 맥심 커피.... 셀 수 없이 많았던 차를 준비해 두고 우리 중 아무나 내키는 대로 불렀다. "미스 리, 쌍화차 한 잔 타서 가져와!"


아이들은 어른들의 그렇고 그런 점들을 잘 알아차린다. 우리는 6학년이었다. 한 번은 그 거만한 얼굴에게 반항을 했다. 칠판에다 선생님에 대한 요구사항을 썼고 낙서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용감하게도 그 칠판을 커튼으로 가려놓았다. 아침에 출근한 선생님이 그 칠판을 열고 노발대발 난리가 났다. 책상을 교실 앞으로 다 옮기고 우린 모두 무릎을 꿇고 교실 뒤편에 앉았다. 주동자 색출을 하느라 열심이었다. 우린 모두 한 마음 한 뜻이었다. 주동자가 누구였는지 나였는지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선생님은 어느 순간 나에게 돌진해 와서 나를 밟았다. 거만한 큰 바위 얼굴이 나를 짓밟았다. 포니테일 한 내 머리도 움켜 잡았다. '나쁜 놈. 너 같은 것 한테 밟히는 게 난 아프지 않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거만한 얼굴도 겁이 났을까, 최소한의 양심이 그를 막았을까, 실제로 그의 발길질이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거만한 얼굴은 우리에게 자율 학습을 많이 시켰다. 그리고 동문회 회장이었는지 말았는지 모르겠다만 그렇게 자주 몇몇에게 봉투 붙이기, 우표 붙이기를 시켰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동문회장이었나 보다. 부당한 대우였다. 우린 맑았고 싱그러웠다. 그런 아이들이었다. 우린 배워야 했고, 양서를 읽고 생각해야 했으며,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는 법도 배워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미스 고, 미스 리, 미스 박일뿐이었다. 교실 뒤에서 벨트 푸는 소리가 들리면, '아이 x, 또 저래, 절대 쳐다보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는 아주 가끔씩 교실 뒤에 가서 뒤로 돌아서서 벨트를 풀고 바지춤을 허벅지에 걸친 다음 옷을 다시 고쳐 입고는 했다.


사회인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나 보다. 어버이날 어느 쯤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을 모시고 뷔페 식당을 갔다. 식사를 다하고 일어서는데 그 거만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큰 바위거만한 얼굴은 웃으면서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 웃음이 좀 역겹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속에는 그는 선생님이 아닌 지 오래였다. 얼굴의 거만함은 세월을 지나 쌓여 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은 듯, 그에게 시간이 멈춘 듯 그렇게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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