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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생미셸 Nov 01. 2020

제2화 개천의 용이 멸종된 한국, 코리아노마드가 꿈틀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직업과 경력을 듣고나면 으레 내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귀한 집 자손이거나, 외국 생활을 오래 한 교포일 것으로 짐작한다. 하지만 나는 토종이다. 그것도 한국의 중산층 기준인 ‘자산 6억원, 월 급여 500여만원’에 미달되는 ‘흙수저’ , 엄밀히 말하면 '동수저' 집안 출신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직업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도 누구나 가서 일하고 싶어하는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 싱가포르에서 억대 연봉을 받으며 미국 100대 다국적 기업의 수석 애널리스트로 일한다는 것은 가히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내 자랑이 아니다. 진부한 성공 스토리도 아니다. 왜냐면, 단순히 외국에 나와 큰 회사에서 일한다고 성공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이 책을 통해 세 가지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첫째, 지금이순간 세계 곳곳에는 ‘코리아 노마드’라는 신인류가 살고 있다. 둘째, 엉뚱한 꿈을 꾸는 자만이 이 ‘코리아 노마드’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 셋째, 국가 간, 지역 간 임금의 격차에 따라 노동력이 이동한다는 경제학 가설로 설명되지 않는 복잡다단한 이유로 ‘코리아 노마드’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자기자랑이나 성공 스토리가 아닌, 발상의 전환과 이단아적 도전정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길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외국어 고등학교, 용쓰던 개천의 용


  “수지야(가명), 지금 시험이 2달밖에 안남았는데…너는 붙기 힘들거 같다. 포기하는 게 낫겠어.”


  때는 1995년 여름. 중학교 3학년이던 나는 외국어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아버지의 갑작스런 실직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넌 커서 뭐 하고 싶니?”란 질문을 들을때마다 내뱉었던 ‘국제 변호사’라는 꿈은 막연했지만 구체적인 도전으로 나를 이끌었다. 바로 외국어고등학교 진학이다.


  하지만 도전은 쉽지 않았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허덕이던 엄마를 졸라 겨우 두달치 보습학원비 10여만원을 마련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악바리처럼 공부에 매달렸던 나인지라, 중학교때도 반에서 1-2등, 전교 5등 이내를 꾸준히 유지했던 나였지만 외고의 문턱은 높기만 했다. 이미 1-2년 전부터 보습학원 특별반에서 외고 입시를 준비했던 다른 아이들은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암호같은 수학 문제를 척척 풀어 냈다.


  보습학원의 특성상, 정답을 맞히기 전까지는 집에 갈 수가 없었는데, 하루는 풀어도 풀어도 답이 보이지 않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붙들고 밤 10시까지 낑낑댔던 적이 있다. 선생님은 급기야 능력은 달리는 데 욕심만 앞선던 나에게 제동을 걸었다.


  “수지야…지금 시험이 2달밖에 안남았는데…너는 붙기 힘들거 같다. 포기하는 게 낫겠어.”


  청천벽력 같았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역시 안되는구나 싶었다. ‘그래…여기 아파트(당시 외고 입시 학원생 99%는 이 지역 부촌,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은수저' 내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애들이었다.)에 사는 애들이나 갈 수 있는 게 외고였지. 나에겐 과분한건가?’


  당시 내가 살았던 서울 서남부 지역 동네엔 보이지 않는 빈부의 격차가 존재했다. 소위 말하는 부잣집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아파트에 살았다. 난 길 건너 허름한 다세대 주택가에 사는 평범한 아이에 불과했다. 


  내가 4살이던 1983년 때 부모님은 전셋집에서 아이들 기죽이며 살기 원치 않으신다며 당시로선 부자의 상징과도 같았던 단독주택(응답하라 1988참고) 을 구입하셨다. 하지만, 우리집이 이 주택가에서 10년을 넘게 사는 동안 길 건너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 변화의 대열에서 제외 된 우리 동네는 서서히 슬럼화 되어갔다. 당시 우리집은 한 마디로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잣집도 아니었다. 지금이야 누구나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당시 90년대만 해도 아파트는 귀했고, 부자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같은 치기어린 빈부격차에 대한 인식은 아마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시절, 친구들은 ‘아파트에 살아야 부자’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실제로 당시 물가 수준에서 비쌌던 그 보습학원에 다니던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대규모 단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의 꿈은 국제변호사다. 그 꿈을 이루는 첫 디딤돌이 바로 외국어 고등학교 진학이었기에.


  난 어릴 때 경쟁심이 강했다. 한번은 중학교 교내 학예회에서 소위 아파트 출신의 한 아이가 발레를 하는 걸 보고 큰 충격에 빠졌던 적이 있다. 이름만 들어봤지 난생 처음 보는 발레 공연은 너무도 고급스럽고 예뻤다. 하지만 그 충격은 언제나 그랬듯 유년기 시절 샘이 많았던 나에겐, 노력의 연료가 됐다. ‘질 수 없지.’ 난 그날 밤새 멋드러진 시화를 그렸다. 그걸 학예회에 출품해 최우수상을 받으며 응수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너는 안돼’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난 곰같은 뚝심이 만들어낸 뜻밖의 성공을 보여주고 싶었다.


  보습학원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의 공부는 계속됐고, 어느덧 시험 전날이 다가왔다. 하지만 하필 그날 아빠는 실직의 고통을 술로 승화하려는건지, 거나하게 취해서 새벽 늦게 들어오셨다. 난 결국 밤잠을 설쳤다.


  직장 생활 13년차가 되어서야 왜 그때 아버지가 술로 괴로움을 달래셨는지, 밥벌이가 얼마나 힘들고 치사한 것이며, 사회란 것이 얼마나 비열한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질풍노도의 호르몬이 폭발했던 10대의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던 나에게 그런 아버지는 그저 닮기 싫은 실패자, 루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난 아빠를 참 많이 미워했었다.


  약주를 걸친 아빠의 늦은 귀가 탓에 시험 전날 밤잠을 설친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시험장을 찾았다. 엄마가 새벽부터 일어나 바리바리 싸주신 도시락 반찬도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나 까짓게 무슨…외고는 사치다”란 생각이 앞섰다. 그렇게 패배주의에 쩐 상태로 꾸역꾸역 1교시, 2교시, 3교시 그리고 마지막 4교시 시험을 치렀다.


  그래도 홀가분했다. 적어도 포기는 안했다. 남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아쉬운대로 외고 입학시험이 끝났다.


  그리고 내가 외고 시험을 본 사실조차 까맣고 잊고 지내던 어느날. 담임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외국어 고등학교 합격.’ 뜻밖의 횡재같은 결과였다. 그 해엔 유독 외국어 고등학교 입학 시험이 쉽게 출제됐다. 과도한 사교육을 방지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적 고려에서 나온 파격적 출제라고 했다. 어찌됐든, 평이하게 출제된 입학시험 덕에 흙수저 내지 동수저 집안 출신인 나도 운 좋게 외고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국제변호사의 꿈에 한발 더 다가가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외고 입학. 한동안 나는 세상을 모두 다 가진 기분이었다. 외고만 졸업하면 바로 국제변호사행 급행열차를 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성취의 기쁨은 황홀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사춘기의 절정을 지나고 있던 나는 난생 처음으로 노력으로도 메울 수 없는 ‘갭’이란 게 존재한다는 씁쓸한 현실을 맞닥들이게 됐다.


  당시 내가 다니던 외고에서는 자신의 전공과 함께 중국어와 영어를 필수로 배우게 했다. 프랑스어과에 진학한 나는 전공인 불어와 함께 중국어, 영어를 집중적으로 배우게 됐다. 수업은 원어민 선생님이 진행하는 20여명 소수정예 반에서 진행됐다. 이론적으로 완벽한 여건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특수목적고에 대해 가졌던 나의 환상은 사라졌다. 이미 교실에는 불어와 영어, 중국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는 친구들이 3분의1이 넘었다. 그들의 유창한 발음에 주눅이 들면서 원어민 교사와의 대화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나의 시험 점수는 50점이상을 넘지 못해 바닥을 기고 있었다. 어렵게 진학한 외국어고등학교는 외국어에 뜻을 품은 학생들을 육성하는 기관이라기 보다는 이미 외국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할 줄 아는 친구들의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결국 첫 시험에서 반에서 7등을 했던 나의 성적은 2학년 초 무렵 40등 이하로 추락하고 말았다. 


  문화적인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한번은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이었다. 반 아이들 중 한명은 당시 유행하던 케니지(Kenny G)의 ‘러빙유(Loving You)’를 색소폰으로 연주하는 장기를 뽐냈다. 단추 두어개를 풀어헤치고 새하얀 실크 셔츠 자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감미로운 색소폰 음색을 전하던 17살의 그 남자 친구의 모습은 중학교때 봤던 발레하던 친구 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실제로 내가 다닌 외고에는 이름을 대면 알만한 준재벌가의 2세, 장관 딸, 외교관 아들 등 변호사나 의사 등 전문직은 물론 사회적으로 성공한 부모를 둔 아이들이 많았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 중산층 이상의 상류층 자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에게 외국어는 어릴 때 살았던 나라에서 이미 습득한 언어였고, 외국어 고등학교란 비슷한 수준의 집안 배경과 경제력을 가진 부모를 둔 아이들끼리의 ‘구별 짓기’를 위한 사적 공간이었다. 나는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사춘기의 클라이맥스를 달리던 나는 점점 더 작아졌다. 나는 외고를 입학한 뒤 비로소 이 사회에 선명하고도 넘기 어려운 계층간의 두터운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린 한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었다. 내가 외고에 들어와서 배운 건 결국 컴플렉스밖엔 없었다.


  나는 매일 아침 6시에 동네 아이들 몇명으로 구성된 사설 봉고차(미니버스)를 허겁지겁 올라타고 1시간30분이나 걸리는 외고까지 통학해야 했다. 밤 11시까지 진행된 강제 야자(야간 자율학습)는 나에게 고문의 시간이었다. ‘노력만 하면 뭐든지 해 낼 수 있다’고 자부했던 나의 자신감은 무너진 자존감과 덕지덕지 늘어난 컴플렉스, 먼지투성이의 자의식에 참패당했다. 한창 사춘기 여드름이 얼굴을 뒤덮고, 호르몬 과잉과 초민감 자의식이 절정을 달렸던 17살 여고생은 급기야 어렵게 들어간 외고를 제 손으로 버리기로 결심한다.


  1997년 4월. A외국어 고등학교 불어과 수지는 일반고인 B여자고등학교로 전학을 선택했다. 명목상으로는 에어컨 설치를 위한 부담금 40만원을 비롯 한달 수십만원에 달하는 비싼 학비를 대기에 쪼들렸던 가정 형편, 비교내신제의 폐지로 받을 게 뻔한 대학입시 불이익 때문이었고, 실제로는 나의 사춘기를 뼈아프게 관통했던 계층의 벽과 상대적 박탈감에 패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 자세히 얘기하면,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나의 자존감이 너무 일찍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17살이 선택한 최소한의 방어기제였다. 외국어고등학교 라는 외계의 공간에는 개천에 사는 용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따라잡을 수 없는 엄청난 격차가 존재했고, 나는 너무 일찍 그 패배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당시 내가 느낀 패배주의는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조사 보고서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OECD에 따르면, 각국에서 사회·경제·문화적 배경 수준이 하위 25%에 속하는 학생 가운데, 자신과 비슷한 배경을 가진 전 세계 학생 중 상위 25%에 해당하는 성적을 받은 경우를 ‘회복력 있는 학생(resilient students)’로 규정하는데, 이처럼 ‘개천에서 난 용’의 비중이 한국은 지난 2006년 43.6%에서 2015년 40.4%로 3.2%포인트 줄었다. 반면 OECD 국가 평균은 같은 기간 27.7%에서 29.2%로 1.5%포인트 올랐다. 일본은 2006년 40.5%에서 지난해 48.8%로 8.3%포인트 증가해 1위였다.


  한국은 점점 ‘개천의 용’들이 살기 어려운 곳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이 땅의 수많은 개천의 용들이 코리아노마드(KOREANOMAD)로 꿈틀대는 하나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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