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인턴십을 마치고 돌아온 뒤인 2006년 1월. 나는 꿈에 그리던 언론사 기자 시험에 합격한다. 기자 시험을 준비한 지 만 3년 만의 눈물 나는 결실이다. 100번의 지원서, 30번의 필기시험, 10번의 최종면접 끝에 고작 1번의 성공을 거둔 성적표는 기쁘면서도 피로했다.
나는 모 신문사에서 그토록 바랬던 기자로 새내기 직장인의 첫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신입 기자가 되기 위해선, 빡빡한 수습기자 6개월과 폭탄주 문화를 이겨내야 했다.
수습기자 교육은 언론재단에서 받는 기자 연수를 포함해 총 6개월가량이 걸리는데 다행히 경제지 기자인지라 혹독한 ‘경찰기자’ 일정은 없었다.
보통 기자가 되면 6개월간 경찰서에서 노숙자처럼 숙식을 해결하며, 사회부 사건 사고 기사를 취재하고 기사를 쓴다. 시체 사진을 보거나 실제로 사망 사건일 경우 시체를 두 눈으로 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무리 경제지 기자지만 언론재단 기자 연수 과정에 포함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시체 부검실 견학은 피해 갈 수 없었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위치한 국과수 빌딩은 입구부터 음산함이 가득했다. 드디어 시체 부검실. 시체 썩는 냄새가 바로 이런 건가. 하지만 막상 진짜 시체를 실물로 보니 두려움보다는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더 들었다. 두 개의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있던 시체 2구는 죽은 이의 시신이라기보다 차라리 마네킹 같았다.
국과수 연구원들은 시체의 두개골을 반으로 자르고 장기를 꺼내 믹서기에 돌리는 등 섬뜩한 업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남다른 노고 덕에 과학수사가 가능하고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들이 억울함을 해소할 수 있다. "꼰대들을 피하라" - 이직을 가장한 탈출
결국 난 첫 언론사의 혹독한 술 문화를 견디지 못하고, 기자 2년 차이던 시절 다시 신입기자 시험을 치르고, 술 문화가 덜 혹독한 경쟁사로 이직 겸 대피를 하게 된다.
‘중고 신입’으로 제2의 기자생활을 시작한 두 번째 직장에서는 다행히 술 마시기를 거부한다고 '저세상 텐션, 4차원, 돌아이' 소리를 들으며 미운털이 박히는 일은 없었다.
운 좋게 좋은 데스크(부서장)를 만나 여자 신입 기자 최초로 전통적 남초 부서인 산업부에 배정받는 영광(?)도 안게 됐다. 당시 2007년만 해도 각 언론사들이 기자 10을 뽑으면 그중에 여자는 고작 1-2명이었다. 게다가 여기자들이 언론사에 들어가 가장 많이 배정받는 첫 부서는 유통부, 국제부, 문화부 등 비교적 덜 힘든 곳들이었다. 그렇기에 신입 여기자 최초로 여성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산업부에 배정받은 건 당시만 해도 파격적 인사였다.
나는 산업부에서 해운, 항공, 조선, 철강, 시멘트 등 소위 말하는 ‘굴뚝산업’을 처음 담당하게 됐다. 평택항에 직접 찾아가 줄어드는 중국향 물동량을 우려하는 현장 스케치 기사[1]를 쓰고, 강원도 삼척의 시멘트 공장에 혼자 찾아가 쓰레기로 디젤유를 만들어 내는 ‘쓰레기의 재탄생’[2]이라는 피쳐 기사도 썼다. 또 당시만 해도 항공사의 신성장동력으로 통했던 기내 면세점 사업 매출이 국내선 매출을 역전했다는 참신한 기획 기사도 썼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취재력이 인정을 받으면서 나는 급기야 여기자 최초로 산업부의 꽃이라 불리는 자동차팀으로 배정받기에 이른다. 덕분에 글로벌 BMW사의 초청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공장인 ‘BMW WORLD’에도 가보고 드레스덴에서 신차 BMW 7 시리즈를 타고 아우토반을 시속 200KM로 질주하기도 했다.
쌍용자동차 사태가 터졌을 때는 시승차로 받은 벤츠 E클래스를 타고 서울과 평택을 하루가 멀다 하고 오가면서 언론사 최초로 쌍용차 사태를 비중 있게 보도하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이 정도면 성공인 것 같았다.
어느덧 2년여간의 화려한 산업부 생활을 마치고 기자생활 5년차. 중견기자로 잔뼈가 굵어 가려던 때에 돌연 국제부로 발령이 났다. 2008년 금융위기, 돼지독감, 글로벌 자동차, 전자 산업의 합종연횡, 각국의 국가 부채 위기 등을 취재하면서 글로벌 감각을 서서히 키워가던 무렵.
문득 어린 시절 그렸던 3가지 꿈 중에 ‘기자’가 포함되었던 진짜 이유가 떠올랐다. 유년기 나의 꿈은 변호사, 기자, 건축 디자이너였는데, 이 가운데 기자가 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해외특파원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국제부에서의 지루하지만 알찬 시간들이 오로지 취업과 언론고시 합격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온 나에게 쉼표를 찍어주었다.
하지만 분명 기자의 현실은 해외특파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외 특파원은 이런 숨찬 기자 생활이 15년간 무르익어 와인과 같은 풍미를 낼 때 비로소 가능한 먼 훗날의 안식년 같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 막연한 꿈이었지만 열렬히 바랬던 해외 특파원. 나는 바깥세상을 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난 그때부터 늦었지만 그토록 바랬던 유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때는 2009년 내가 서른이 되던 해였다.
그런데 5년여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다. 대한민국의 중심에는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이 있으며, 한국의 사회라는 곳은 아줌마와 할머니를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라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자 초년병부터 유통부, 산업부, 국제부, 사회부를 거치며 만나온 기업인들과 직원들의 대부분이 30대에서 50대까지의 아저씨 혹은 그 이상의 할아버지들이었다. 대한민국을 이만큼 부강하게 하고 번성하게 한 뿌리에는 항상 그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대한민국이 뼛속까지 남성 중심적인 사회이며, 나쁘게 말하면 상명하복과 위계서열, 마초적인 군대문화가 상식으로 통용되는 ‘꼰대 공화국’이라는 증거였다. 이들을 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5년여간 겪었던 한국의 사회생활은 폭탄주 10잔을 강요받았던 술자리만큼이나 마초적이며, 수직적이었고, 열외를 인정하지 않는 매일이 최전선인 군대와 같았다.
비교적 여성스러운 외모를 지녔던 20대 후반의 나를 그들은 ‘귀여움’ 내지는 ‘당참’의 이미지로 이해했다. 겉은 여자지만 속은 남자인 나의 캐릭터를 유독 ‘꼰대’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성역할의 고정관념 속에 파묻혀 남자 같은 여자와 여자 같은 남자를 거슬려하고, 상하관계를 철칙처럼 여기며, 높은 지위에 오르면 마땅히 대접받아야 한다고 맹신하는 특정 개저씨와 개할배들을 ‘꼰대’라 일컫는다. 물론 모두가 꼰대는 아니었다. 10명 중 2-3명은 말이 통하는 어른이었다.
하지만 대체로 나는 상사가 퇴근하기 전까진 사무실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었고, 다른 견해가 있어도 숨겨야 했다. 한국사회에서 여자는 아주 여자스럽거나 아예 남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여야만 속 편히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끔은 여자스럽고 가끔은 남자스럽고 또 가끔은 중성스러운 나의 다채로운 캐릭터는 꼰대들의 심기를 건드리기 십상이었다. 내 색깔을 드러낸다는 것은 스나이퍼 앞에 내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었다. 때때로 꼰대들은 나를 ‘4차원’ 혹은 ‘돌아이’로 비하하기도 했다.
나는 때로 상처 받았지만 그들의 판단을 나의 자아와 동일시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분명 나를 이단아 보다는 상식의 스펙트럼 안에서 정의하는 보편적 다양성이 갖춰진 지역이 지구 상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으리라 생각했다. '꼰대 공화국' 한국에서 경험한 사회가 디폴트가 아니었음은 외국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됐다. 말이 통하는 어른을 만나고 싶었던 나의 갈증은 유학으로 이어졌다.
난 다른 나라들이 궁금해졌다. 유학을 준비하는 순간순간 ‘꼰대 공화국’에서의 숨 막힘은 증폭되었고 나는 매주 주말마다 티비에서 나오는 KBS의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여행 다큐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가 외국 땅을 밟을 탈출의 그 순간만을 피 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