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었던 기사 중 흥미로웠던 것 중 하나는 대학 졸업 후 3년이 지나면 입사 서류 통과 확률이 10%도 안된다는 내용이다.
학벌과 학점, 어학 성적 등 스펙이 뛰어나도 졸업 후 공백이 길면 대기업과 공기업 등 ‘괜찮은 일자리’를 얻기 어렵다는 정부 연구 기관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국내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 중 100군데 인사 담당자를 설문한 결과,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이 서류 전형에서 가장 중시한 것은 졸업시점이었다. 졸업한 지 3년이 넘으면 학점이 4.0을 넘더라도 서류 통과율이 7.8%에 불과했다.
2005년 3월 다행히 대학을 졸업한 지 일 년이 채 안된 시점이었지만, 나는 학점이 4.0을 넘지 못해서였는지 서류 통과율이 10%를 밑돌았다. 100개를 넣으면 고작 10군데 정도에서 필기시험을 보라고 연락이 왔으니 말이다.
대학생 시절 오랜 꿈이었던 국제변호사가 되려면 최소 1-2억 원이 드는 로스쿨 유학길에 올라야 한다는 현실을 깨달은 뒤, 난 방향을 틀어 언론사 기자를 준비하고 있었다.
2001년 6개월간 미국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한 탓에 졸업이 1년 반 늦어진 나는 친구들 대부분이 캠퍼스를 떠난 2004년 8월 Y대학교 인문학부를 졸업하게 됐다.
취업의 문턱은 높기만 했다. 각고의 노력에도 나는 번번이 기자 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다. 기자 수험 기간이 길어질수록 자신감은 없어지고, 삶에 비관적으로 변해만 갔다.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던 나의 신념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맥을 못 추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삼성이다, LG다… 대기업에 합격할 때마다 나의 자괴감은 극에 달했고, 급기야 나는 대학교 졸업식에도 불참했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백수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학사모를 쓰고 부모님과 졸업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기자 수험 생활을 시작한 뒤, 나는 여러 스터디를 전전했다. 내가 살던 곳 동네 도서관은 나의 근무지나 다름없었다. 일주일에 2-3팀의 스터디에 참여해 백수탈출의 의지를 활활 불태웠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100개의 서류를 넣으면 고작 10개의 언론사나 방송사에서 필기시험 기회를 줬다. 그마저도 필기시험을 합격한 곳은 5곳도 안됐다.
2003년 초에 시작된 언론고시의 자갈 길은 2004년 8월 대학을 졸업 한 지 한참 후인 2005년 3월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만 3년 차 장수 언론고시생인 셈이다.
나의 험난했던 언시생 생활은 10번째 최종면접에서 쓴잔을 마시면서 급기야 브레이크가 걸렸다.
나는 모 중앙일간지 서류에 통과한 뒤, 필기시험, 1차 면접을 거쳐 당당히 2박 3일 일정의 2차 면접에까지 이르렀다. 그 언론사에서는 2차 면접에 총 20여 명의 후보를 초청해 발표, 토론, 술자리 면접 등 다양한 평가를 진행했다.
나는 발표를 위해 ‘탑골공원 성역화로 갈 곳을 잃어버린 노인들’을 취재한 다큐멘터리 영상까지 만들었다. 다행히 2차 합숙 면접까지 통과, 마지막 임원면접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그동안의 길고 긴 2년여간의 언론고시 생활이 끝나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사장과 임원 3명이 참석한 최종면접에서 그동안 썼던 논술과 작문 등 100여 편의 글이 담긴 원고지 뭉치를 꺼내 들며 “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외쳤다.
하지만 너무 힘이 많이 들어가 부담스러웠던 탓일까. 그들은 나를 뽑지 않았다. 모 언론사 낙방 통보를 받던 그날. 나는 무작정 고속버스를 잡아 타고 포항으로 내려갔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이었다. 그때 숙박비를 아끼려 들어간 찜질방에서 불가마처럼 끓어오르던 그 타들어가던 방에서 혼자 흐느껴 울었던 때를 생각하면, ‘이게 바로 지옥 불구덩이구나’ 싶었던 것 같다.
‘100번의 지원서. 30번의 필기시험. 10번의 최종면접. 그리고 0번의 합격.’
10년이 훨씬 지난 요즘에도 청년백수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거론되고 있지만, 당시에도 청년백수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난제 중의 하나였다.
난 더 이상 지원서를 쓸 수 없었다. 내가 쏟을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그때 나를 패배주의의 나락에서 건져낸 건 ‘해외시장개척요원’이라는 정부 프로그램이었다. 친구 소개로 우연히 알게 된 그 프로그램을 통해 난 세상은 넓고 아직 도전할 기회는 많다는 희망의 씨앗을 발견했다. 중소기업청은 해외 무역 활성화와 미취업 청년실업자들의 취업 장려를 위해 지난 2004년부터 2005년 상반기까지 해외시장 개척 요원 1779명을 전 세계 20여 개국에 파견했다.
3개월 간의 해외 체류 기간 동안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상품을 현지에 홍보하고 수출을 장려하는 이 프로그램에는 당시 커다란 사회 문제로 떠올랐던 청년 미취업자들이 대거 지원했다. 실제로 대학 졸업예정자나 대학 졸업자로 구성된 미취업자 요원은 전체의 65%인 1,156명을 차지할 정도였다.
당시 언론에서는 해당 프로그램이 미취업자들의 어학연수나 해외 관광용으로 악용되고 있다며 혈세 낭비, 운영 허술이라는 지적을 퍼부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때의 경험이 큰 자산이 되어 내가 취업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도록 만든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맡은 품목은 경북의 한 대학교 산하 중소기업이 만든 애완용 세정제품이었다. 4주간의 무역 관련 실무 교육과 업체 현장 실습을 마친 뒤 나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KOTRA 무역관으로 파견됐다.
난생처음 가 본 유럽의 도시는 지적이고 세련되었다. 스위스 독일어를 사용하는 취리히에서 적응하느라 처음에는 좌충우돌하는 실수도 연발했다. 하루는 아침거리를 사러 마트에 갔는데, 오븐에 구워 먹는 피자용 밀가루 반죽(Dough)인 줄 모르고, 딸기와 생크림 등으로 꾸며진 포장지만 얼핏 보고는 생크림 딸기 롤케이크로 착각해 구입해 낭패를 보기도 했다.
한 번은 스위스 취리히 외곽에 있는 업체에 방문해 바이어를 만나기로 했는데, 갑작스럽게 복통이 찾아와 길 한복판에서 쓰러질 뻔 한 아찔한 경험도 있다.
스위스 취리히 무역관이 주최한 한국 무역 전시회에서 아토피 등 피부질환 치료 효과가 있는 어린이용 스킨케어 제품을 바이어들에게 홍보하고 통역과 번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2년여의 긴 도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직장인 타이틀을 허락하지 않았던 언론고시의 문턱에서 좌절했던 나는 해외에서 한국 제품을 홍보하고 무역을 장려하는 활동을 통해, 예비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엿보는 한편,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재충전하게 됐다.
비록, 당시 언론에서 꼬집었듯이 나의 활발한 시장 개척 활동이 실제 무역 거래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대신 이때의 경험은 더 이상은 나아가지 못할 것 같았던 무기력한 청년백수에 불과했던 나에게, 아직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이 있다는 희망의 불씨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때 취리히에서 만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은 이 세상에 스스로 꿈과 직업을 개척하고 국경을 초월해 살고 있는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잡 노마드’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줬다.
당시 만난 친구 중 지금까지도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 중에 중국계 말레이시안 출신의 이브(Eve)가 있다. 이브는 유년기 시절부터 해외에 살았다. 쿠알라룸푸르 출신인 그녀는 싱가포르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기를 보냈다. 영국 브리스톨 대학교에서 학사를 마친 뒤엔 영국의 EY(언스트 앤 영)에서 컨설턴트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스위스 취리히의 Goldman Sachs(골드만삭스)로 이직했다. 취리히에 5년째 살고 있던 그녀는 그곳에서 한국계 미국인인 존(John)을 만나 결혼한 뒤 현재는 골드만삭스 도쿄 오피스에서 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싱가포르 출신인 앤디(Andy)는 답답한 섬나라인 싱가포르를 벗어나고 싶어 스위스에 왔다고 했다. 독특한 싱글리쉬(Singlish) 억양을 갖고 있던 앤디는 IT 엔지니어로 10년째 독일계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홍콩 출신인 데이빗은 유럽에 살고 싶어, 영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런던에서 가정의학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처럼, 이미 세상에는 다양한 이유와 목적으로 일찌감치 해외에 나와 일하고 있는 수많은 노마드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통해 내가 그동안 한국의 바늘구멍만 한 길에만 집착해 온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수많은 취업준비생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민생이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청년들은 청춘의 꿈을 고시촌 쪽방에 저당 잡힌 채 잿빛 미래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저성장의 장기화 속에서 대기업으로 가는 바늘구멍은 갈수록 좁아지고 입성 기준은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있다. 11월 청년(15-29세) 실업률은 8.2%, 11월 기준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8.8%) 이후 1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취업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청년들은 노량진으로 몰려간다. 재수생의 성지였던 노량진은 이미 공시생(공기업 시험 준비생)의 성지가 된 지 오래다. 25만 명에 이르는 전체 공시생 중 5만 명이 노량진에 터 잡은 채 힘겹게 합격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0월의 지방직 공무원 7급 공채 경쟁률은 122대 1에 달했다. 4월 치러진 국가직 9급 공채(4120명)에는 22만 1853명이라는 역대 최대의 지원자가 응시했다.”적어도 이 시험은 공평하죠. 몇 점 이상은 합격, 그 이하는 탈락. 부모의 재력이나 학벌, 외모 등 다른 요인들이 개입될 여지가 없어요.”—중앙일보
나도 한때 열리지 않는 취업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공무원, 공기업 등을 준비한 적이 있다. 다른 한국의 수많은 취준생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하지만 대학생 중 83% [4] 가량이 선택한 이 길 대신, 나는 이때부터 ‘코리아 노마드’의 길을 꿈꾸게 됐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