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미디어 학자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1970년대 초 “21세기 인류는 최첨단 전자기기를 갖추고 전세계를 떠도는 ‘디지털 유목민’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독일의 미래학자 군둘라 엥리슈(Gundula Englisch)도 “21세기 인류는 일자리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도는 ‘잡 노마드’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프랑스의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아예 21세를 ‘노마드의 시대’로 규정했다.
군둘라 엥리슈는 그의 저서 ‘잡 노마드’에서 인류는 본래 자원과 안전을 찾아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는 유목 본능을 타고났지만, 국가의 형성과 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정착 생활을 영위해 왔다고 분석했다.
정착은 정부 차원에선 가족 단위의 정착 생활로 조세의 편의성을 높이고, 산업 및 기업 차원에선 조직 단위의 정착형 노동으로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 시키며 우월한 삶의 방식으로 군림해 왔다.
하지만, 지난 1만여년 간 인류를 지배해왔던 ‘정착’의 개념은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글로벌화(Globalization)와 정보(IT)혁명에 힘입어 국가 간 경계와 시공의 제약이 허물어지면서 인류의 잃어버린 유목 본능은 ‘호모 노마드’라는 신인류를 탄생시키며 부활의 전기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의 글로벌 오피스에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의 직원들과 한 데 어울려 일 하고,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와 노트북을 들고 전세계 시장을 찾아 다니며 사업을 벌이는 디지털 비즈니스맨의 등장은 이제 더이상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21세기형 ‘호모 노마드’는 이같은 공간적 이동을 뛰어 넘어, 지난 1만여년 간 인류 사회를 지배해 온 틀에 박힌 정착형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삶의 터전을 바꾸어 가는 창조적인 삶을 지향하며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IT강국 중 하나인 한국에선 최첨단 전자기기와 일상이 접목된 ‘디지털 유목민’의 삶이 젊은이들의 삶 속에 뿌리 깊게 파고든 지 오래다. 어쩌면 그 어느 나라 보다도 한국인은 디지털 유목민의 삶에 가까이 맞닿아 있는 지 모른다.
몇년 전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한 대목처럼 ‘인류 최초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체험한 유일한 세대’라는 일명 ‘삐삐세대’를 시초로 한국의 2030세대들에게 노마드적 삶의 방식은 인생의 상당 부분을 이미 관통하고 있다.
어느덧 불혹이 된 필자 역시 이같은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삐삐와 PC통신을 손쉽게 접했고, 대학교 1학년이던 1999년엔 ‘세상의 중심은 나, T’라는 광고 문구와 함께 등장한 모 통신사 모바일폰의 주요 고객이었다.
노트북 컴퓨터와 무선인터넷, 휴대폰을 발판 삼아 사건 현장을 시시각각 뛰어다니는 취재 기자로 2000년대 후반기를 보냈고, 현재는 싱가포르에 위치한 다국적 기업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며 ‘잡 노마드’로 살아가고 있다.
2001년 미국 워킹홀리데이, 2005년 스위스 인턴십, 2010년 영국 석사 유학, 그리고 2012년 싱가포르 해외 취업에 이르기까지…다양한 형태로 여러 나라를 떠돌면서 필자는 나와 닮은 수많은 한국 젊은이들을 접했다.
독특한 해외 방문의 기회를 스스로 발굴해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을 시험하고, 한국의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아무 기반도 없는 해외에 나와 공든탑을 다시 쌓아가는 ‘코리아노마드(KoreaNomad)’를 발견하게 된 건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실제로 한국산업인력공단 자료에 따르면 최근들어 해외취업자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2009년 1,571명이던 해외취업자 수는 2011년 4,057명으로 세배 가까이 뛰었다. 연령별로는 2009년부터 2011년 사이, 해외취업자 가운데 29세 이하가 6,741명으로 가장 많았고 30-34세(1,560명), 35-39세(451명)이 뒤를 이었다. 40세 이상은 533명에 그쳤다. 해외취업자의 무려 94.3%가 2030세대였다. 성별로는 여성(4,989명)이 남성(4,296명)을 앞질렀다. 20-30대 젊은층과 여성층이 코리아노마드적 삶에 더욱 맞닿아 있다는 걸 옅볼 수 있다.
코리아노마드들은 실로 다양한 동기와 이유를 바탕으로 글로벌 떠돌이족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것은 역마살처럼 그저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일 수도 있고, 소위 부모 잘 만나 외국 물 좀 먹어본 글로벌하고 럭셔리한 상류층의 삶의 방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채로운 이들의 삶의 스펙트럼 속에는 지극히 한국적인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인 공통분모가 오롯이 배어 있다.
1997년 IMF구제 금융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경제 대재앙을 10년 주기로 체험한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만성적 청년실업의 공포 속에서 꽃다운 청춘을 보냈다. 청년 백수 틸출을 위해서라면 ‘88만원 세대’로 일컬어 지는 척박한 일자리와 열악한 임금조건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 세대들에겐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기성세대의 훈계와 위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대신 이들은 차별화를 위해 다양한 스펙 쌓기에 몰두했고, 해외 어학 연수, 해외 인턴십, 워킹 홀리데이 등의 해외체험 프로그램은 취업을 위한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대한민국 젊은이들은 국내를 떠나 해외를 떠도는 유목민적 DNA를 탑재하게 됐다.
정부가 청년미취업자 해결의 단골 대책으로 쏟아냈던 해외 연수 및 취업 프로그램도 코리아 노마드의 탄생에 불을 지폈다. 몇년 전 정부가 추진했던 ‘글로벌 10만 리더 양성 사업’도 이같은 맥락에서 시작됐다. 과거 특정 계층과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가능했던 해외 체험은 국가의 세금으로 마련된 이같은 공공 프로젝트를 통해 대중화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아울러 경직된 노동 시장 탓에 젊은층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데 실패한 정부가 청년 실업의 대안으로 해외 취업 장려책을 추진하면서 청년들의 해외 체험 기회는 점점 흔해졌다.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와 경제 성장에 힘입은 원화강세 시대의 도래는 과거 부유층의 사치재 혹은 기호품에 비견됐던 해외 여행을 보통재로 대중화 시켰다. 저가항공의 등장은 이를 가속화 했다. 이제 누구나 단 돈 몇 십 만원이면 값싼 비행기표를 끊어 해외 여행을 즐기는 시대가 됐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저출산 고령화의 덫에 걸린 선진국들이 쏟아낸 청년층 이민 장려 정책도 코리아노마드의 등장을 재촉했다. 2009-2011년 사이 해외에서 취업한 한국인들 가운데 상당 수가 청년층 이민 장려책을 펴고 있는 호주(2,107명), 캐나다(1,489명), 싱가포르(291명) 등에 집중됐다.
21세기와 동떨어진 구태의연한 좌우 이념 대립과 정쟁으로 얼룩진 한국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탈정치화 단계에 이르른 일부 한국 청년층들은 ‘엑소더스(Exodus) 코리아’를 통해 탈출구를 찾기도 했다. 가부장적 조직 문화와 상명하복식 군대 문화가 남존여비의 유교문화와 만나, 가정은 물론 기업에까지 뿌리 깊은 한국 사회에서, 일부 젊은 2030 여성들은 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김으로써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2030세대들에게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자리 잡고 싱글족과 비혼족이 늘어나면서 세계 각지를 떠도는 유목민적 생활 방식은 전보다 실현 가능성 높은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K-POP과 한류 열풍은 한국적인 것도 세계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글로벌 무대의 문을 두드리는 코리아노마드들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심리적 기폭제가 됐다.
필자는 앞으로 지난 10년간의 해외 생활과 유년기 시절 경험을 통해 한국적 사회, 문화, 경제, 정치, 산업적인 요소들을 연결 짓고 분석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코리아 노마드’가 누구인지, 나는 왜 글로벌 떠돌이의 삶을 살아왔는지 이 책에서 차례차례 이야기해 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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