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다 Feb 05. 2023

집안 정리

할 일을 제 때 안 하고 왜 계속 미루려는 걸까. 

항상 어떤 중요한 일을 앞두고 그것을 가장 마지막으로 미루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결국 해야 하는 것은 그것인데 그 주위를 뱅뱅 맴돌기만 한다. 



곧 여행을 떠난다. 

머릿속엔 캐리어를 꺼내어 옷가지와 필요한 것들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내 몸은 이상하게도 딴짓을 하고 있다. 일주일간 방치되었던 세탁실을 정리하고 괜히 싱크대를 열어보고, 비울 것이 없나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심지어 아직 추위가 가시지도 않았는데 옷을 들어내어 한바탕 정리하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얼마 전 책장 이야기도 썼으니 더 이상 보지 않을 책을 꺼내어 재활용수거장에 내놓고 싶다. 

됐다. 그러다 여행 가기도 전에 온몸에 알 배기겠다. 



아직 액션을 취하지도 않은 일련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결국은 짐가방을 싸야 할 것이지만 말이다.



자꾸 어떤 일을 할 때 이런 패턴을 보이니, 가끔은 답답하다. 

할 일을 먼저 하라고!

그런데 결국은 그것을 가장 나중으로 미루고야 마는 나.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인 건가. 



누가 쳐다보지도 않을, 그렇다고 확인하지도 않을, 나만 아는 것들을 정리하고 닦으며 갑자기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이럴 때면 뇌라는 것이 정말 기똥차다. 내가 그 사람을 찾으라고 엔터를 누르지 않았지만 기가 막히게 필요한 순간 그 사람을 떡하니 내 눈앞에 그려내놓다니.








그 사람, 그분은 대학 시절 불어교수님이었다. 

전공으로만 꽉 채워져 있던 틈바구니에서 정말 숨이라도 쉬고 싶어 불어학개론을 신청했다. 

고등학교 제2 외국어가 불어라는 이유로. 나름 엄청나게 무서운 선생님 아래서 불어책 한 권 달달 외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불어를 선택했다. 뭐 괜히 피어오르는 유럽피언에 대한 환상이 한 소금 더해지긴 했을 거다. 그렇게 강의 첫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무렵. 예상외의 피겨를 가진 교수님이 등장했다.



올랄라~~~ 

피치 높은 고음으로 불어를 발사하며 등장한 그녀는.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외모의 여자였다.

새까만 칼 단발머리에 뱅으로 내린 앞머리, 그리고 동동 날아다니는 세모 모양의 빨간 입술, 날씬하게 쭉 늘여놓은 듯 키가 컸던 그녀. 나의 불어 교수님이었다.



매시간 그녀의 수업은 불어를 배운 시간이 아니었다. 내 예상과는 다른 수업이었지만, 내가 바랬던 '빡빡한 수업 가운데서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시간'에는 부합했다. 불어를 배운다고 생각했었지만 우린 철학 수업을 듣고 있었다. 매 시간의 주제는 이런 것들이었다.



왜 살고 있나요?

밑도 끝도 없이 이런 철학적 질문이 던져졌다. 



한참을 내가 왜 사나 이런 생각들로 정신없어질 때쯤, 바로 오늘 내 눈앞에 나타난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녀는 매년, 학기가 끝나면 두 달가량의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유럽을 너무나 사랑해서 항상 유럽으로 떠난다던 그녀. 어느 대문호의 묘지 앞에서 몇 시간이라도 그를 떠올린다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는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 가방을 꾸리기보다 집을 청소하는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왜? 여행 가방을 꾸리고 계획을 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그녀의 다음 말이 그대로 내 뇌리에 박힌 듯하다.



"여행을 떠나면 돌아오지 못할 수가 있어요. 간혹 불의의 사고라던가.... 그런데 내가 남겨놓은 나의 흔적들을 누군가는 보지 않겠어요? 나는 내 마지막 모습을 정리하고 가고 싶어요. 그것이 설령 마지막이 아니라 해도, 항상 떠나기 전 그런 마음가짐을 갖는 거죠. 올랄라~"



내 마지막일지도 모를 모습을 내가 정리하고 간다. 그 말은 당시 나에겐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살면서 한 번도 하지 않은 생각이었기에 더 그랬을 거다. 훌쩍 여행이라도 마음껏 떠난다는 것이 아득히 먼 이야기이기도 했고.



그 교수님과의 만남은 고작 한 학기였지만 지금도 그녀의 모습이 이렇게 정확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살면서 만난 몇 안 되는 꽤나 인상적인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 가방은 안 싸고 계속 집안 정리를 하는 나를 보며 문득 깨닫는다.



'그저 스쳐 지나간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내 머릿속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었어.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렇게 아웃풋이 되고 있어.'



일단, 정리는 마치자 싶다.




작가의 이전글 AI는 내 목소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