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공항면세점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마스크를 낀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모두 코로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동안 마스크를 껴왔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지금은 쇼핑을 해야 할 시간!
탑승시각은 오후 2시 40분인데 11시도 안 되어 모든 준비를 마치다니.
이왕 시간을 얻었으니 신나게 걷고 쇼핑하자 싶었다.
몸이 자동으로 향수코너로 걸어 들어갔다.
'칙칙'
몇 번의 분사에 없던 물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달달한 향기 앞에서 스르르 몸이 녹아내렸다.
'칙칙'
몇 번의 테스트를 더 하니 향수 몇 개가 덥석 계산대 위에 올라가 있다.
"실컷 써"
엄마의 플렉스. 엄마는 이번 여행에 통 크게 모든 비용을 다 쓴다고 했다. 200만 원을 달러로 환전했고, 여행 전 지인들로부터 꽤 많은 현금을 받았다. 엄마에게 선물을 사드려도 모자랄 판에 참으로 민망한 딸이지만, 이왕 향수에 취한 거 오랜만에 질러보자!
고생하고 있을 남편들의 향수 하나씩 담고, 뚱이와 나의 향수도 하나씩. 엄마는 두 개.
기분 좋게 쇼핑을 마치고 선글라스를 보러 갔다.
멍청하게도 옷만 몇 벌 싸고 선글라스 하나를 안 챙겨 온 나였다.
"요즘엔 이런 너구리 모양이 유행인가 봐"
선글라스를 끼며 신이 났다. 면세장 내의 적당한 온도에 몸이 흐물거리며 본격적인 쇼핑에 빠진 찰나.
한쪽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엉덩이가 아파오는지 방망이질이 시작되었다.
빨리 골라야 한다고 생각하자 더 못 고르겠다. 그래도 골라!
여행은 참 신기하지. 소비하지 않는 사람도 꿈쩍 못하게 하는 힘을 가졌으니. 그래도 양심 있는 나는 중저가 선글라스를 하나 골랐다. 그 와중에 뚱이는 명품으로 재빨리 하나 골라오는 능력을 보여줬다. 역시 뚱.
엄마 지인들의 선물을 끝으로 우리의 쇼핑은 마감되었다. 오전 시간에만 8 천보를 넘게 걸었다고 뚱이가 말해줬다. 부랴부랴 점심을 먹고 게이트로 가니 시간은 벌써 2시를 넘기고 있었다.
머리가 뽀글뽀글한 아주머니들이 꽤 많이 앉아 계셨다.
미국 LA 여행 단톡방에서 한 달 동안 이미 친분을 쌓으신 분들은 서로 닉네임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눴고, 벌써 몇몇 분은 꽤 친해지신 듯했다. 엄마도 임영웅을 응원 하며 알게 된 '블랙 프라다' 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같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생전 모르던 사람들을 어쩜 이렇게 금방 하나로 만들 수 있을까?'
영웅시대로 보이기만 하면 영웅시대 인사인 '건행'이 이어졌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로 임영웅이 만든 건행국의 인사법이다.
손을 기역자로 구부려 '건행'이라고 외쳐주기만 하면 된다.
아 웃겨. 이곳에선 건행만 외치면 모두 환하게 웃어주고 금세 친구가 된다.
오후 2시 40분
드디어 비행기에 올랐다. OZ 202편 52열, 가운데줄 4석 중 3석이 우리의 자리였다.
나와 뚱이가 가운데 끼었는데 내 옆자리엔 배가 불룩 나온 아저씨가 앉아 계셨다. 엄마를 위해 통로석을 드렸지만 중간에 꼭 낀 나는 11시간을 어찌 앉아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뭐. 비행은 항상 설레니 좋아. 비행기가 이륙 하자 벨트를 풀고 본격적인 각자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기내식을 시작으로 분주하게 자기만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여행 전부터 계획해 온 나의 로망이 하나 있다면, 비행기에서 책을 보는 것과 짧게라도 글을 써보는 것. 이 날을 위해 에코백엔 책 한 권과 블루투스 키보드가 들어있었다. 뚱이와 엄마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나는 책과 키보드를 재빨리 꺼냈다.
타타타닥... 우왓. 너무 재미있어. 글을 막 쓰고 싶은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 둥둥 떠다니는 생각을 대충 메모했다.
"너 여기서도 글 쓰니?"
뚱이의 어처구니없는 눈빛.
알아요 알아요. 내가 좀 이상해 보이죠? 그런데 너무 하고 싶었어요. 타타타다. 시끄러우니 그만할게요.
여행 중 한 권의 책을 읽자며 가져온 책을 펼쳤다. 에잇 잘 못 가져왔어. 일본 소설인데 번역이 매끄럽지 않고 문장이 팍팍 꽂히질 않았다. 억지로 60페이지를 읽었을 무렵, 오른쪽에 앉은 아저씨를 보니 어라.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으신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브런치 페이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도 얼른 핸드폰을 꺼내 오프라인으로 저장된 밀리의 서재 책을 읽었다. 기내에서는 종이로 된 책 보다 적당한 조도가 있는 전자책이 훨씬 집중이 잘 되었다. 아저씨는 신경 쓰지 않으셨겠지만, 나는 아저씨와 누가 누가 더 오래 책 읽나 내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름 몰입이 잘 되었다.
4명이 주르륵 앉아있는 이코노미 좌석이란 마치 투명 감옥 같았다. 날씬하고 다리 짧은 사람이 유리한 투명감옥.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미 어느 정도 친해진 아주머니들 틈에서 다음 간식 메뉴는 피자라는 이야기가 솔솔 들려왔다.
'아줌마들은 진짜 기내에서 다음 메뉴도 알 수 있어?'
내심 궁금했다. 정말 간식으로 피자가 나오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한지 정확히 30분 후, 따끈하게 데워진 피자 한 조각이 나왔다.
oh my god.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와인을 두 잔이나 마셨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뚱이가 준비한 여행사의 일정표를 살펴보며 아무 준비 없이 시작한 여행을 대충 스캔해 보았다. 시간은 느린 듯하면서 참 빠르기도 하다. 여행을 기다렸던 한 달이라는 시간은 기억이 날 듯 말 듯 안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곳에 앉아 있다.
이 시간 아이들은 무얼 할까. 한 번도 엄마 없이 잔 적이 없는 아이는 오늘 밤 누구랑, 어디에서 잘 것인가. 이런 생각이 잠시 스쳤다. 아이의 생각은 이때가 끝이었던 것 같다. 정확히는 그 뒤로 아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11시간의 비행.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바다를 건너고, 아침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전 8시 15분. 한국에서 이미 보냈던 화요일 아침으로 미국에 도착했다.
잠을 못 자 멍한 눈으로 창문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앗차. 정신을 차린 뒤 급하게 비행기모드를 해제하고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정인아, 나 지금 LA에 도착했어. 굿모닝!"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친구의 카톡이 왔다.
"웰컴 투 캘리포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