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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Mar 07. 2023

나는 4학년입니다

4학년. 내게는 참 특별하고도 기억에 남는 학년이다.

'어린 시절을 다시 살기 위해 아이를 낳는 건 아닐까'라고 김애란 작가가 말했다지.

정말 그런가 곰곰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


아이의 나이만큼, 그 일분일초만큼 나는 엄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이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기가 막힌 인연으로 만난 사이가 아닌가. 그런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런지는 몰라도, 아이가 4학년이 된 요즘 나는 그야말로 4학년이다.


4학년은 괜스레 겁을 주는 학년이다.

내가 어릴 때는 그랬다. 4학년부터가 중요하다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나는 그 숫자에 꽤나 의미를 부여했다.


마침 안개에 가려져있던 희미한 기억이 아주 활발하게 맑아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맑은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내 선생님이다.


안순애 선생님. 나의 4학년 담임.

첫사랑이나 은사님을 찾아주던 티비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도 선생님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꿈틀거리게 해 주었던 분.




4학년이 되기까지 초등학교를 네 군대나 다녔다.

잘 나가던 사립초등학교에서 시작됐던 초등 생활은 가세가 기울어감에 따라 공립학교로, 지방학교로 끝없는 전학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까지의 학교생활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불우하다면 불우했던 시절일까.

3학년 어느 날, 교실스피커로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알려드립니다. 보내드린 노트는 반에서 가장 불우한 이웃 한 명에게 전달해 주세요"


잠시 뒤 나타난 선생님은 대뜸 나를 교탁 앞으로 부르셨다.

'왜 나에게 이걸 주는 거지.' 

달아오르는 양 볼의 화끈거림이 아이들의 눈에 띄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필 그것도 아이들이 빤히 다 보고 있는 앞에서.

이왕 주실 거면 조용히 따로 주실 수는 없나. 

이런 생각이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받을 수도 안 받을 수도 없던 노트 30권. 그대로 교실을 뛰쳐나가고 싶게 만들었던 노트 30권. 


터져 나오려던 눈물을 참으며 내 자리로 돌아오던 길, 애꿎은 노란 잠바의 보풀을 떼어냈다. 이 보풀 때문에 그런 거라고, 유독 눈에 띄는 노란 잠바의 검은 보풀 때문에 그런 거라고 괜스레 노란 잠바를 탓했다. 노트는 엄마에게 거짓말을 시켰다. 공부 잘해서 받았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엄마에게 처음 해보는 거짓말을.


노란 잠바 때문에 불우이웃이 되었던 나는 그 당시 세 자릿수 덧셈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학교도 친구도 선생님도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는 차가운 교실, 그곳에 수학 시간이면 앞에 나가 손을 들고 있던 내가 있다.




처음 받아보는 엽서였다.


"살은 깨, 예쁜 아가씨 숙현이 보아요.

글씨도 너무 예쁘고 마음씨도 너무 고운 숙현이는 이 긴 겨울방학 동안 어떻게 보냈을까?

덜렁대며 너무 말을 빨리하는 습관을 고쳐야 정말 예쁘고 고운 아가씨가 될 수 있을 텐데.

이제 5학년이구나. 5학년이 되면 4학년 때 못했던 1등도 한 번 해 봐야지.

그리고 금세 다른 친구들도, 선생님도 사귀어서 빨리 5학년에 적응해야 해.

그렇다고 선생님을 잊으면!!! 알지? 안녕"


주근깨를 컴플렉스 삼아 '검은 머리 이숙현'이라고, '빨간 머리 앤'의 불우한 시절을 품고 살던 나.

그런 나의 주근 깨를 살은 깨라고 불러준 선생님.

누군가에게 처음 받아본 집으로 배달된 엽서.


가슴이 뛰었다. 두근두근. 나 사랑받고 있었어.

빨간 머리 앤이 처음 초콜릿을 깨물었을 때의 황홀함이 이런 거였을까.

대낮인데도 하늘엔 별이 날아다녔고, 폭죽이라도 터질 것 같은 새까만 밤하늘이 내 눈앞에 있었다.


마음속에서 이상한 파도가 밀려왔다. 나 잘하고 싶어. 잘해보고 싶어.

누구를 위해서인지, 무엇을 위해서인지 몰랐다. 그냥 닥치는 대로 잘 해내고 싶었다.

눈꺼풀에 테이프를 위아래로 붙이고 졸린 눈을 붙들었다.

졸린 눈을 붙들고 사다 놓은 문제집을 하루에 한 권씩 풀었다.

알에서 서서히 깨어나던 시간 4학년. 작고 단단했던 알을 톡톡 두드려 주었던 선생님.






아이가 4학년이 되니 불현듯 선생님이 생각난다. 몇몇 반 아이들도 생각난다. 잊었던 기억까지도 하나하나 되살아 나온다. 어쩌면 김애란작가의 말이 맞겠다. 이렇게 4학년을 다시 살고 있는 나를 보면.


이제 다 커버린 빨간 머리 앤 나는, 어느덧 4학년이 된 내 아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간절히 소망한다. 아이가 빨간 머리 앤의 초콜릿을 맛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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