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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Apr 04. 2023

냄새의 이유

주말 동안 빨지 못한 베개에선 사춘기 아이 머리 냄새가 풀풀 났다. 샴푸로 두세 번씩 박박 문지르라 해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어느새 부쩍 자란 아이에게선 포근한 아기 냄새가 사라졌다. 대신 이부자리 곳곳엔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머릿내가 자리 잡았다.

말로만 들어보던 남자 냄새가 매일 밤 내 코를 괴롭혔다.

'아 또 베개커버 빨아야겠네...'

'내 머리에서도 이런 냄새가 나나'


한가한 오전시간, 이부자리를 들어냈다. 세탁기를 돌리고 건조하기를 몇 차례, 따끈해진 이불과 베개 커버를 끌어안고 나와 의자 곳곳에 걸쳐두었다. 봄이 오긴 온 건지 썰렁하던 집안 공기도 어느새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이불도 빨았겠다. 매트리스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이지만 대청소를 하기로 했다. 밤마다 얼마나 뒤척였는지 이불의 펄럭거림이 먼지를 많이도 토해놓았다. 매트리스를 들어내어 오래간만에 구석구석 청소기를 가져다 댔다. 밤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아침이 되니 눈에 거슬릴 정도다.


먼지를 빨아들이고 매트리스도 제자리에 놓으니 묵은 때가 벗겨진 듯 개운했다. 내친김에 걸레도 잡았다. 특히 머리와 가까운 부분을 집중적으로 문질렀다. 잠자리용으로 한쪽벽에 기대 두었던 책도 들어 올렸다. 아니 들어 올리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이 벽에 붙어 안 떨어진다. 이게 무슨 일인가. 조심히 책을 들었다. 순간 달콤한 사탕냄새가 콧속으로 훅 밀려 들어왔다. 뒤이어 파란 슬라임으로 보이는 것이 책과 벽을 연결시킨 채 찌이익 늘어났다.

'아 씨'


껌이다. 풍선껌. 하필이면 파란 풍선껌.

문득 며칠 전 생각이 떠올랐다. 하교를 하자마자 신이 난 아이는 주머니에서 풍선껌 한 통을 꺼냈다. 엄마에게 풍선껌 맛을 보여주고 싶어 아~~~ 소리를 내며 달콤한 껌하나를 내 입속에 쏙 집어넣었다. 제가 느낀 세상을 엄마에게 보여주려는 아이가 귀여워 오랜만에 껌을 씹으며 단맛을 쭉쭉 빨아 음미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그 껌이 파란색이었던가.


그 달달했던 냄새를 기억에서 잡아내니, 지금 벽에 붙어있는 저것의 정체를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제 쪽도 아니고 엄마가 자는 쪽 머리맡에 껌을 붙여 놓았을까. 그것도 책으로 가려놓으면서까지. 아이가 없는 시간이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옆에 있었다면 한바탕 소리라도 질렀을 텐데. 운 좋은 날이군.


껌을 떼어보려 했다. 하필이면 하얀 벽 위에 새겨진 파란 껌. 물이라도 묻히면 떨어지려나. 급하게 물티슈를 갖다 댔지만, 껌이 풀이라도 된 건지 종이벽지에 찰싹하고 달라붙어 물감이라도 칠해 놓은 모양이다. 이 벽은 이미 오래전에 망했으니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게 다행이다.






네 살, 그때까지 말이 없고 조용하던 아이가 그날따라 더욱 조용했다. 이사 온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은 집은 나의 로망대로 하얬다. 그 텅 빈 하얀 벽이 뭐가 좋다고 매일 쓸고 닦았다. 그런 때였다. 내 살림에 신이 나던 때.


조용했던 그날, 난 내 눈을 의심했다. 그 넓디넓은 하얀 벽에 그것도 피처럼 빨간 그 무엇인가가 한줄기 회오리바람처럼 벽을 훑고 지나간 후였다. 바닥에 앉아 있는 아이의 손에는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립스틱이 들려있는 광경.


"야아아아!!!"


그건 분노에 찬 사자의 울부짖음이었다. 겨우 완성해 놓은 그림이 찢기기라도 한 듯 뱃속에서 화덩어리가 올라왔다.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 조차도 몰랐던, 조용히 감춰져 있던 야수 한 마리가 나타났다. 말 못 하는 아이는 야수의 몸부림에 애먼 눈만 껌뻑댔다. 울었나. 안 울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울었으니까.


그날 이후로 그 벽을 보면 화가 올라왔다. 뭐라도 가져와 그 벽을 가려야 했다. 천장 몰딩에 못을 박아 긴 패브릭을 늘이기도 했고, 책장을 가져다 붙이기도 했고, 아무튼 그 벽은 내내 가려져있었다. 그 벽이 내 눈에 들어오면 여지없이 화가 올라왔으므로. 아이는 그날 이후로 벽에 낙서를 하지 않았다. 미쳐 날뛰는 야수 한 마리를 본 충격은 그런 것이었겠지.


말을 재잘재잘 잘도 하던 어느 토요일 오후, 갑자기 아이에게 그 벽을 맡겼다. 저 시뻘건 기억을 네 손으로 없애주었으면 좋겠다. 그림 한 점 그려주겠니. 그 벽을 허락했다. 어쩌면 그 벽은 원래 아이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벽에는 화산이 하나 생겼다. 아이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화산을 그려놓았다. 그 속은 알지 못하지만 뜨거운 마그마 같은 것이 그 안에 가득 차 있지는 않았는지. 검은 화산 덕분에 붉은 립스틱은 용케도 그림 안에서 사라졌다.


벽을 허락하니 자신감이 붙은 아이가 다시 낙서를 시작했다. 대놓고 눈에 띄는 벽면에는 하지 않았지만 어느 구석엔가 자기만의 표식을 해 놓기 시작했다. 립스틱의 충격이 너무 컸었는지 놀란 사자 소리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단지 나만 알아챌 수 있는 '끙'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물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도 기겁하긴 마찬가지겠지만, 그날처럼 한 마리 야수가 되지는 않을 텐데. 십 년이나 나이 든 엄마는 이제야 철이 조금 들었는지 그날을 떠올리며 반성한다.


풍선껌을 닦아내려 했지만 결국은 닦아내지 못했다. 그런대로 대형 벽화 아래서 파란 점 역할을 해주는 듯 보이기도 했다. 화룡점정. 그림 밖의 점에게 넌지시 이름하나를 붙여 주었다. 잠을 자려 누우면 내 머리맡에선 달콤한 풍선껌 향기가 난다. 언뜻 머리맡에 향초를 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의외로 기분이 좋아진다. 매일 밤 머릿냄새가 아닌 향긋한 냄새로 잠을 잘 자라는 아들의 배려인가. 그래서 엄마 머리맡에 껌을 붙여놨나. 아들의 깊은 속내에 감탄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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