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나올 무렵이었다. 밋밋했던 가슴팍에 몽우리가 잡혔고 한 여름 입은 티셔츠 위로 볼록한, 마치 작은 물만두 같은 것이 티가 나기 시작하자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몸이 둥글해지니 마침 입을 옷도 마땅치 않았는데, 그 여름 엄마가 시장 좌판에서 골라온 옷은 분홍색 티셔츠였다.
그 옷을 보는 순간, 그냥 싫었다. 베이비핑크라고 불리는 은은한 분홍색에 목 주변으로는 자그마한 레이스가 장식된 티셔츠였다. 아직은 사춘기가 오지 않았는지 엄마가 골라온 옷을 군소리 없이 입었지만 그 옷을 입으면 어김없이 심한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때부터였을까. 뭐 그 이전에는 색에 대한 호불호가 기억나지 않으니 이것을 내가 처음으로 싫다.라고 인식한 색이 맞을 것이다. 핑크가 싫었다. 안 그래도 이제 막 여자라고 온몸에서 얘기해 주고 있는데 거기에 분홍색으로 정성 들여 포장을 하고 리본을 묶어, 짜잔! 보세요. 여기 한 여자가 탄생했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하는 느낌이 들어 온몸이 간지러웠다.
핑크라고 썼지만 정확하게는 베이비핑크라고 말하는 것이 맞겠다. 여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으레 그 아이들의 몸에 두르게 되는 그 색 말이다. 나는 그 색이 싫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분홍색 옷을 입어 본 기억이 없다. 내 돈으로 사본적은 당연히 없고 어쩐 일인지 엄마도 그 이후로는 분홍색 옷을 사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는 이 색이 너무 좋아.라고 하는 색도 딱히 없었던 걸 보니 나는 색에 있어서는 무취한 인간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옷이란 어쩔 수 없이 입어야 하는 것이다. 잘 때라고 벗을 수도 없는 그것. 그렇다면 당연히 색을 입을 수밖에 없는데 사실 옷을 골라라 하면 내가 골라오는 것들은 무취 그중에서도 거의 블랙에 가까웠다. 어찌 보면 가장 강렬한 색이지만 아무 곳에나 묻힐 수 있고 튀지 않는 색, 적당히 나를 가려줄 수 있는 색. 블랙.
그렇다고 내가 블랙을 가장 좋아하나.라고 물어본다면 그렇지 않다. 내가 입고 싶었던 색은 언제나 화이트였으니까. 새하얀 그 느낌이 좋았는데 어쩐지 몸에 걸치기에는 불편하게 느껴져 바라만 볼 뿐, 거의 입어 본 기억이 없다.
분홍은 싫어해서 걸치지 않고 화이트는 좋아하지만 불편해서 걸치지 않고 강렬하지만 무취인 블랙을 고집하던 이냉이씨. 아무리 봐도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분홍과 세트인 레이스만 봐도 오소소 소름이 돋던 그 아이.
스타일리스트로 일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이런 나의 편견을 산산 조각낸 색이 분홍이기도 했는데! 실장님은 그야말로 색채의 마술사. 분홍을 세상에서 가장 멋진 색으로 만들어 버려, 그 색을 보는 순간, 저 색이 내가 알던 그 분홍이 맞나.라는 마법을 부려 놓았기 때문이다.
화이트와 핑크, 핑크와 베이지, 핑크와 베이비블루, 한 여름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미풍을 떠올리게 하던 색의 조합들! 그 이후 분홍에 대해 편견을 갖지 말자고 다짐은 했지만, 어쩐지 내 몸에 걸친다는 건 생각만 해도 온몸이 근질근질하긴 마찬가지였다.
분홍에 대한 편견을 깬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는데 그녀는 바로 패리스 힐튼. 온몸을 분홍으로 휘두르던 여인. 분홍이 아닌 건 찾아볼 수 없었던 여인. 우. 하던 입술엔 언제나 동동 뜨던 분홍이 선명하게 찍혀있던 여인. 그녀를 따라 한 때는 매트하고 허연 분홍을 입술에 발라볼까도 고심해 봤지만 역시나 그 색을 바르고는 밖에 나갈 수 없었다. 분홍은 언제나 부끄러움을 몰고 다니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분홍에 대한 편견이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분홍으로 위아래를 꾸민 어린아이들을 보면 놀란 눈길을 멈출 수가 없다. 아무리 여자의 색이라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저 정도로 분홍이 좋은 것일까. 상하의는 물론 양말에 구두, 가방까지 분홍으로 깔맞춤 한 아이들을 보면 그 옛날의 나는 과연 여자아이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여자로 잘 못 태어난 이냉이씨. 실은 남자여야 하는 이냉이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남자가 입었을 때 훨씬 더 그 매력을 뽐내는 색이라고 인식하게 된 분홍. 오늘이 공유 씨 생일이라던데 그가 입으면 왠지 녹아버릴 것만 같은 아이스크림 색. 분홍. 이냉이씨가 남자로 태어나면 도전해 보고 싶은 색이 분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