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 찌지 않는 애들은 도대체 왜 안 찌는 걸까. 마른 친구들이 보이면 끈질기게 물어보았다. 내 친구는 말했다.
"걔네들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야. 아무리 먹어도 금방 내보내니 살이 안 쪄. 먹기만 하면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가거든"
아. 마른 애들은 변비가 없구나. 어느 날, 깊은 깨달음이 왔다. 맞아. 중학교 때 유난히 뚱뚱했던 친구는 20일을 화장실에 못 갔다고 했던 말이 그제야 떠올랐다.
먹는 것도 조절하고 운동도 꾸준히 했지만, 요 몸무게란 것이 자기 자리를 아는 것인지, 도대체 움직이질 않았다. 몸은 자기 몸무게를 기억한다고 한다. 몇 킬로가 빠져도 시간이 지나면 기가 막히게 원래 몸무게를 기억해 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뭐야. 단식도 지독한 운동으로도 살은 결국 안 빠진다는 거잖아. 아무리 노력해도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요요는 당연한 거야?
그랬다. 몸무게는 들쑥날쑥 이었고 먹는 방법을 요리조리 바꿔봐도 늘 제자리였다. 그렇다고 더 이상의 단식 같은 건 안되었다. 이때부터 하나 추가 된 것이 변비차였다.
'먹자, 일단 먹고, 마시자'
아침이 된다. 학교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탄다. 앗 싸르르 배가 아파온다. 안돼 안돼. 산통을 경험한다. 후후 숨을 몰아쉰다. 버스 정류장이 다가오면 준비하고 있다가 번개같이 내려 화장실로 달려간다. 학교도 가기 전에 이미 땀에 절은 파김치가 된다. 이건 나의 아침 루틴이었다. 이런 고통 속에서도 이 차를 손에서 내려놓을 수없는 건 먹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기가 막히게 덜어줬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생강차를 음미할 시간에 나는 변비차를 마셨다.
이렇게 열심히 달려간 학교생활은 이전과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미리 정신 차린 친구들 덕분에 나도 내 길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짝사랑하는 선배도 돈가스도 친한 친구도 내버려 둔 채 과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성적이었다. 학점 3.0이 넘어야 그곳에 갈 수 있었다.
1학년 성적에 학사경고는 없었지만 개판이었다. 뭐 먹고 마시고 선배 보러 학교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먹고 마시다 툭하면 못 일어나 1교시 수업은 못 간 적도 많았다. 그런 나를 보면 내 아빠는 한 소리 했다.
"침대랑 너랑 꿰매 놨냐"
뻘쭘해서 아무 말 안 했지만,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우리 아빠. 대학 가더니 살은 무섭게 찌고 아침에 일어나지는 않고. 뚱뚱한 술고래라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친구의 내 목소리를 흉내 낸 대리 출석으로 그나마 출결을 채워준 것이 신의 한 수였을까. 어쨌든 2학기 내내 다이어트만큼이나 달라붙어 수업 좀 듣고 신경 썼다고 내 학점은 평균 3.0이 넘었다. 내가 저질러 놓고도 덜커덕 되어 버리니 실감이 안 났다. 나 진짜 역마살 꼈나 봐. 초등학교도 4군데를 다니더니 대학에서도 과를 바꾸네. 이런 생각이 밀려왔다.
의상학과. 옷 잘 입는 애들과 패션에 관심 있는 애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곳. 왠지 날씬한 아이들이 바글바글 할 것만 같은 그곳. 그림 좀 그리고 싶다고 덜커덕 바꿔버린 내 인생. 아니 어쩌면 내가 소망하던 길로 나 스스로 걸어간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지. 선배를 못 보고도, 나 잘 살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막막했다. 풀리지 않는 다이어트만큼이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