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다 Jan 10. 2023

초저녁 잠

할머니가 되기 위한 마음가짐

언제부턴가 나의 패턴이 달라졌다. 자꾸 초저녁이 되면, 그러니까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나면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는 저녁을 먹고 나면 아이 목욕이 끝나고 저녁 공부가 시작되었다. 그에 따라 나도 괜히 마음이 바빴다. 


"얼른 하고 자자"


이 말이 버릇처럼 튀어나왔고 뭐에 쫓기기라도 한 듯 마음이 초조했다.

이런 나였는데, 왜 나는 초저녁 잠을, 그것도 꿈까지 꾸어가며 한 잠을 푹 자고 있을까.

요 며칠 이 문제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머리를 그렇게 많이 썼나. 음. 많이 썼지. 글 쓴다고 아주 머리가 팽팽 돌아갔지.

그렇다고 이렇게 매일 아이 봐줘야 하는 시간에 자나. 그 간의 초조함은 다 어디 간 거지.

그런데 어김없이 잠이 온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패턴인데'


이건 할머니들이 나이 드시면 주무신다는 그 초저녁잠 아닌가. 그러다가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시는 뭐 그런 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눈이 침침해서 언젠가부터 내가 다니는 동선에는 내 엄마에게 얻은 돋보기가 그 새 3개나 자리를 잡고 있다. 내 책상 위에 제일 잘 보이는 것으로 하나, 식탁 위에 다리가 약간 기우뚱한 것 하나, 잠자리 옆에 두 번째로 잘 보이는 것 하나.


눈이 침침하다. 책이라도 아니 스마트폰이라도 볼라치면 글자들이 뿌옇게 일어나 도통 보이지가 않는다. 초점을 맞추려 눈살을 찌푸리니 미간에 주름이 다 생겼다. 어느 날 돋보기를 껴보니 이렇게 맑은 세상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내 폰이 태블릿처럼 엄청 커 보였다. 순간 어이없이 기뻤다!


그건 그렇고 노화가 가장 빨리 온다던 눈만 늙은 줄 알았는데, 이제 잠까지 이 시간에 오다니. 아이는 아직 새파랗게 어린데 난 이미 노화걱정을 하는 엄마가 되었다.





사실, 어이없지만 몇 년 전부터 할머니에 대한 로망이 생겼다. 머리는 단발머리일 것, 너무 치렁치렁 긴 머리는 좀 안 어울린다. 내가 되고 싶은 할머니는 우아한 할머니가 아니다. 본래가 우아하지 못하므로 좀 발랄하고 유니크한 할머니가 내 이상형이다. 앞머리는 내릴까 말까 고민 중이다. 옷은 예쁘게 입고 싶다. 이왕이면 컬러코디 기가 막히게 통통 튀게 입고 싶다. 장신구도 좀 치렁치렁했으면 좋겠는데 지금도 귀찮다고 안 하니 할지 말지는 장담할 수 없다. 모습은 이래도 마음만은 단아하고 우아한 할머니. 누구와도 대화가 통하는, 살 거 다 살아본 멋쟁이 할머니가 내 이상형이다. 노화가 감지된 순간 이런 할머니의 모습이 상상되기 시작했다. 이 할머니는 글을 쓸 거다. 이건 얼마 전에 추가되었다. 눈밑 다크서클이 내려와도 주사를 맞는다거나 하지 않는 천연의 할머니가 될 거다. 

일단 좀 자고.





할머니들이 어떻게 하루를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그 많은 세월을 다 기억하며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칠십이 넘은 내 엄마가 옆에 있다. 사회적으로 할머니 나이인 내 엄마. 엄마는 젊은 시절 잠꾸러기였다. 그런데 내 엄마는 이제 새벽 5시면 일어난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지만 언제나 5시에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초저녁이면 어느샌가 조용하다. 초저녁 잠을 자는 것이다. 


할머니들에게 관심이 많은 나는 내 엄마 친구들을 자주 만난다. 친구분들이 집에 찾아오시기도 하고 밖에서 점심 약속을 가지기도 하는데 툭하면 끼어서 같이 만난다. 그리곤 내 친구라도 만난 듯이 같이 떠들고 먹고 마시다 집으로 돌아온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 안에는 내가 살아가야 할 세월이 잔뜩 있다. 안 가본 세계라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어느새 신나게 듣고 있다. 그러다가 슬며시 끼어 그분들에겐 까마득한 육아질문도 곧잘 한다. 그러면 기가 막히게도 지금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을 얘기해 주신다. 


"만약 아이를 다시 키우신다면 공부 잘하는 애가 좋으세요, 아니면 살가운 애가 좋으세요?"

뭐 이구동성 살가운 자식이다. 


"키우시면서 후회되는 것 있으셨어요?" 

밥에다가 간장만 비벼 먹인 것이 후회된다고 하신다.


얘기를 들어보면 초저녁잠이 아니라 더 일찍 주무시는 분들도 있다. 점심을 드시면 바로 주무신단다. 그렇게 4시까지는 누가 깨워도 모를 만큼 주무시고 저녁 드시고 다시 주무시고 새벽 3시에 하루를 시작하신다는 분도 있다. 이건 미,미,미라클모닝이다. 


왜 자는 시간이 바뀌는 것일까. 새벽 3시에 일어나면 나라도 점심 이후에는 잠이 쏟아질 것 같지만, 난 굳이 새벽에 일어나지도 않는데 말이다. 초저녁 잠을 자니 좋은 점은 있다.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 내가 자면 그 시간, 아이는 혼자 할 것을 한다. 자면서도 안 자는 척 아이의 질문에는 신통방통하게 대답을 하곤 하는데 그러면 아이는 저 혼자 책을 읽는 다던가, 다음에 뭘 할 것이라는 둥 나에게 끊임없이 할 것들을 얘기해 준다. 참 고맙다. 그런데 이 애미가 좀 졸리다. 그러면 견디다 못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엄마, 딱 30분만 잘게" 


아이가 인정해주는 꿀맛 같은 30분은 1시간이 넘어가고 나는 땀까지 푹 흘려가며 잘도 잔다.  

이러다가 진짜 잘 시간이 되어 아이가 잠들면 나는 슬며시 미라클 새벽을 맞이한다. 

이건 아까 말한 영락없는 내 엄마 친구 할머니의 패턴이다!

이런 것도 미라클모닝이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나는 슬며시 미라클해지고 있다. 

뭐 어차피 할머니가 될 거니까 미리 준비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다만, 혼자 시간을 지내는 아이가 좀 애처로울 뿐이다. 엄마가 너무 빨리 할머니가 되어서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현숙이가 생각나는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