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편하게 하라

나훈

by 이다

집안에 가훈은 없지만 나 스스로에게 '나훈'을 하나 만들어줬다.

만들려고 작정하고 만든 것은 아닌데 어느 날 급작스럽게 만들어진 '나훈'이다.


가훈 한집안의 조상이나 어른이 자손들에게 일러 주는 가르침
나훈 내가 나에게 일러주는 가르침 (내가 만든 말임)


나란 사람, 몇 년을 정리에 빠져 정리전문가가 되어도 시원찮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았다. 나 스스로 정리전문가를 자처하며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집안을 뒤엎고 정리를 해댔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리송하다. 이런 나는 눈에 보이는 정리 상태뿐 아니라 가구 내부가 흐트러져도 싫었다. 누워서 장롱 내부를 스캔해 보고 마뜩지 않으면 벌떡 일어나 정리를 하곤 했다. 빨래가 예쁘게 개어 있어야 좋았다. 흐트러지면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것은 오랜 생활 패션일을 하며 얻었던 직업병이기도 했다. 백여가지도 넘는 제품을 빌려와 촬영을 하고, 촬영이 끝나면 고스란히 반납해야 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단 하나의 분실도 허락되지 않았다. 너무 고가의 제품일 경우는 홍보실에서 장갑을 끼고 나와 제품을 다룰 지경이었으니 나는 그야말로 제품을 신줏단지 모시듯 촬영을 하고는 고이고이 원래대로 포장해서 보내야 했다. 이런 나에게 저절로 스며든 것이 정리병이다. 물건은 일렬로 다소곳이 한눈에 보이도록 놓아야 했다.



이 정리병은 결혼과 함께 본격적으로 내 생활에서 튀어나왔다. 장롱의 옷은 물론이고 싱크대의 그릇, 세탁실의 세제통 하나도 각을 잡고 서있었다. 바닥에는 한 올의 머리카락도 허락되지 않았다. 습관처럼 한 올의 머리카락을 줍고 다니는 나였다.



그 무렵 여기저기 블로그에서 보았던 화이트 미니멀리즘은 이런 나를 더욱 부추겼다. 그녀들의 서랍엔 모든 티셔츠들이 색깔별로 서있었고 양념통은 한 가지로 통일되어 이름표를 달고 있었으며, 열어젖힌 냉장고에도 사각의 반찬통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누구를 위하여 내가 이 짓을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정리를 좋아했지만 가끔은 정리가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누구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온전히 내 만족을 위해 하는 것인데, 이게 곰곰 생각해 보니 나를 괴롭히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직업병으로 얻었던 정리병, 나를 꽤 열정적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던 그 병이 어느샌가 나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들을 따라 해보려 했다. 그런데 미니멀리즘이란 것이 나에게 더욱 깊숙이 스며들어 집안의 물건이 남아나지 않았을 때쯤, 내 안에서 어떤 말이 들렸다.


'너를 편하게 하라!'



이 반복적인 바지런한 동작들, 그리고 어김없이 바지런함을 무너뜨리는 계속된 행위들.

빨래를 한다. 빨래를 각 잡아 갠다. 각을 무너뜨리고 옷을 입는다. 다시 빨래가 된다.



이 과정을 다 없애버리자 싶었다. 이 또한 미니멀리즘 아닌가? 과정을 간소화하는 미니멀리즘말이다. 물건만을 비우는 것이 진정한 미니멀리즘은 아닐 거다. '생활도 간소화해 보자'라는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 이런 생각이 물밀듯 일자, 그때 내 안에서 정확히 이 말이 들린 거다. 너를 편하게 하라!



이 말이 들리자 나는 바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행동, 나를 귀찮게 하는 것,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나훈이 정해지자 내가 하는 일은 아주 일목요연해졌다.

대주제가 정해지니 그에 상응하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없애버리면 그만이었다.

특히나 집안일을 할 때 나훈은 아주 유용했다.



수건은 탁탁 두 번을 접어 반으로 갠다. 삼등분으로 접어 돌돌 말았던 것이 반만 접자 일이 반으로 줄었다. 접은 수건은 서랍에 쓱 넣어두고 매일 하나씩 꺼내 쓴다. 속옷은 개지 않는다. 바구니를 만들어두고 종류별로 던져 넣는다. 꺼내 쓰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바구니에 던질 때 쾌감은 덤이다. 양말은 짝만 맞추어 동그랗게 말아버리면 끝이다. 신랑 옷은 개지 않는다. 전부 옷걸이에 걸어둔다. 이렇게만 했는데도 빨래 개기는 더 이상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빨래 개는 기계가 나오길 간절히 바라던 나는 드디어 빨래 개기에서 해방이라도 된 듯 편해졌다.



옷을 걸거나 수납을 할 때, 공간이 꽉 차 있으면 매우 불편하다. 어쩔 땐 다 집어던지고 싶을 때도 있다. 이럴 때 나훈이 말한다.


공간을 비워라!



매주 주말이 되면 옷을 쓱 둘러보고 이번 시즌에도 안 입고 있는 옷들을 골라낸다. 그렇게 한 바탕 비워내고 나면 빨래가 된 옷을 수납할 때 한결 편안해진다. 옷 사이사이로 드러난 공간이 다음 옷이 들어갈 자리를 마련해 준다. 그 공간을 보기만 해도 나는 매우 흐뭇하다.



신랑 혼자 쓰는 방에는 말없이 작은 무선 청소기를 넣어 주었다. 아침이면 알아서 떨어진 머리카락이며 먼지등을 청소하고 나간다. 갑자기 생긴 청소기를 보니 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잘 되었다. 청소해야 하는 공간이 하나 줄었다. 나를 아주 편하게 했다.

나머지 공간은 하루에 한 번 운동삼아 슈루룩 청소기를 돌리면 끝이다. 어느새 말끔한 내 집을 만나게 된다.



나훈이 생기고 나의 생활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더 이상 집안일을 혼자 감수하지 않는다. 화장실청소도 밥 먹은 그릇도 잠자리의 이불도, 사소하지만 매일 끝없이 해야 하는 일들을 식구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쩌면 나를 위한 일이고 어쩌면 그들을 위한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더욱 한 식구가 되어간다.



매일 해야 하는 일들을 미니멀하게 만들어 나를 편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남아돌게 된 시간을 아낌없이 나를 위해 쓰는 것.

내 생활은 단순하게 나는 꽉 차게.

이것은 나훈이 나에게 알려준 최고의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