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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Jan 11. 2023

느는 건 연기

사람, 연기, 그리고 소통

 내가 사는 이곳에도 한국의 국민연금과 비슷한 적금 제도가 있다. 정부에서도 거주자들이 가입하도록 독려하고, (아마도) 65세가 되면 매달 일정 금액을 지급받을 수 있다. 영주권을 취득하고 난 직후, 나와 아내가 알아본 것은 지원제도와 이 적금이었다. 어느 날 아침, 아내 명의로 들 이 적금을 알아보기 위해 거래 은행을 방문했다. 풀네임과 생년월일, 신분증 등을 확인한다. 그리고 꺼내든 적금 제도 정보가 담긴 브로셔 하나. 단박에 영어가 너무 많다는 거부감이 들면서, 꽤 두꺼운 분량의 그 브로셔를 펼치며 5가지로 나눠지는 해당 적금에 대해 은행원 할머니?가 내게 영어를 던지기 시작하신다. 초반에는 적금 가입자 본인인 아내에게 영어를 던지던 이 할머니가 어느덧 내게로 눈길을 주고 있다. 아팠다. 아무래도 아내보다 영어 말하기는 내가 조금 나은 편이라 나와 소통이 되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본격적인 눈길이 내게로 향하며 쏟아지는 금융 관련 용어들이 마치 영어라는 몽둥이가 내 귀를 집중적으로 뚜드려 패는 듯 했다. 나는 어떻게 했을까? 이렇게 했다. 


"well... um... yep... good... That’s all right." 


 어느 정도 입에 익은 감탄사와 단어들로 은행원의 말에 장단을 맞추었다.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다. 그분은 혼자 허공에 치고 있는 자신의 박수를 눈치 챘을까? 나는 금융 영어 듣기를 하고 있는 긴장한 수험생(고객)일 뿐이었고, 그분은 허공에 박수를 치고 있는 네이티브 스피커였을 뿐이다. 나는 거의 알아듣지 못 했던 것이다. 


 사실 금융에 관심이 없기도 하지만, 한국에서도 은행에 가면 금리부터 시작하는 은행원들의 말을 쉬이 알아듣지 못 했다. 하물며 영어로? Oh My... 대충 마무리를 한 나는 회사로 향했고, 아내는 집으로 돌아갔다. 일을 하느라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씻고 긴장이 풀리니 문득 드는 생각 한 가지. 


 ‘못 알아듣는 연기가 이제는 수준급이구나.’ 


 나오는 한숨과 함께 한 그 안타까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영어를 쓸 수 밖에 없을 때 연기하는 내 자신에 스스로도 익숙해진 것이다. 


 사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영어’라는 유리천장이 다를 뿐, 내가 닿지 못 하는 대상을 언제나 끼고 있다는 것이 삶과 비슷하다. 사람을 강하게도 하고, 약해지게도 하고, 열정을 불사르게 하기도 하고, 다 집어치우고 싶게도 만드는 것. 삶이 이 후자들의 흐름을 탈 때 연기력은 특히 상승한다. 내 생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룡영화제 수상 후보로 올려도 좋을 만큼의 연기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 연기력이 ‘나’라는 우리 각각의 생존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대부분의 정상 범주에 있는 사람들이 신경증을 앓고 있다는게 이런 뜻일거다. 어느 정도의 긴장과 어느 정도의 불안과, 어느 정도의 좌절을 마주하며,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루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이 (굳이 네이밍하자면) ‘삶의 기술’ 되겠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정체성에 혼란이 오고, 삶의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연기를 하지 않으면 오늘 하루, 아니 당장을 살아내기 힘드니... 그런데 내 안에 전혀 없는 모습이라면 연기로라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나만의 속설이다. 연기력이 늘 수밖에ㅠㅠ 


 늘어가는 연기는 나의 깊어지는 이중성을 반증한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십 몇 년의 시간이 살면서 가장 내 자신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지독스럽게 혐오하던 때였음을 지금에서야 인정한다. 결혼을 하고, 매일 같은 사람과 부딪히고, 맞춰가는 과정을 반복하며, 또한 아이 둘을 낳아 기르면서 또 서로를 긁고, 호~해주는 시간을 지나며 마주하는 내 모습들은 예전으로 치면 이중뿐일까, 엘리트 다중이었겠지만, 지금으로는 그건 그냥 나의 여러 가지 모습들 중 몇 가지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족한(?) 연기력에 개탄을 금치 못 할 때도 많다. 사회부적응적이라고 묘사할 수도 있고, 반항장애급의 성격파탄이 아닌가 싶을 때도 종종 있다. 매일 만나는 나의 이런 모습을 스무스~하게 받아들이고, 상황을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잘 조절하게 되면, 나의 연기력은 +1된 것이다. 여전히 정확히 (나이 말고) 어떤 사람들을 이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MZ세대들은  지금 내 말들이 와닿을까 뜬금없이 궁금하다. 때로는 그들의 당당함과 자신감이 부럽기도 하면서, 그들의 마음 속도 똑같을까 하는 호기심과 함께 나도 지금보다는 더 당당한 40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을 가져본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연기도 같이 하는 사람이 있고,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연기지, 그렇지 않으면, 병원 가서 의사 선생님과 면담을 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연기로 그득한 삶을 돌아보는 통찰도 깊어지고, 타인의 눈을 의식하며 살기에 사회에 적응하며 살 수 있는 능력치도 상승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외줄타기와 참 비슷하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순간 떨어져서 다치거나 골로 간다. 한쪽으로 한참 기울어지면, 그만큼 다른 쪽으로 몇 배의 힘을 주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다시 전진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것. 내 자신을 돌아보되 남도 돌아볼 수 있는데서 나오는 연기력의 향상. 


 나는 그런 연기자가 되고 싶다. 


2023011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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