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이콜과 구공탄 Jan 17. 2023

그때의 아빠, 지금은 아버지

사람, 무서움, 그리고 소통

 이제 한 달이 있으면 내가 사는 이곳에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오신다. 못 만난 지 3년이 지났다. 몇 주 전 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안 좋다는 얘기를 엄마에게 들었다. 여기도 안 오고 싶다고, 힘들어서 못 갈 것 같다고 하셨단다. 작년부터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왠지 모를 싸한 느낌에 기분이 심히 좋지 않았다. 엄마의 얘기를 들을 때도, 지난주에 통화를 할 때도 그 싸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 전에 걱정이 되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 기다리고 기다리다 끊으려고 하는 찰나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노인의 목소리.


 “여..보..세요...헉..헉...헉...”


 내 아버지는 맞는데, 내 아버지가 맞나?


 “몸이 계속 안 좋아요?”

 “몸이 좀 안 좋네...”

 “다음에 전화할께요. 일단 쉬세요.”

 “아니다. 얘기해라.”

 “아니에요. 지금은 쉬시고 다음에 다시 전화할께요.” 


 분명 집에 계실텐데 전화를 받는 목소리의 아버지는 숨이 차다 못 해 이 먼 곳까지 그 쇠한 기력이 전해질 정도다. 전화를 끊고 난 후 더 짙어진 싸함이 나를 후려친다. 그리고 이어진 생각? 느낌??


 ‘무섭다.’ 


 부모와 친한 자식도 있고, 부모와 서먹한 자식도 있고, 부모와 안 보는 자식도 있고, 부모를 모르는 자식도 있겠다. 나는 부모를 몰랐으면 했던 10대와 부모와 서먹했던 20대를 지나 부모와 친해진 30대를 거쳐 40대인 지금은 부모를 못 보고 있는 자식이다. 


 맨날 저렇게 일만 할 거면 아빠는 왜 아빠일까? 나랑 공 한 번 안 차고, 놀러 한 번 안 갔던 아빠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했고, 내가 일어날 때 쯤에는 이미 아침까지 다 먹고 또 일하고 있었다. 늘 신경질적이었고, 말 그대로 불같았다. 내 십대 시절 아빠는 그랬다. 지방 대학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부모님들과 점점 떨어져 살게 되었다. 


 10대 때 갖고 있던 의구심과 반항심을 기반으로 20대 때는 본격적으로 아버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나를 컨트롤하거나 다그치시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대학생 때 아버지의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여전히 많구나... 무슨 생각을 하며 사셨을까? 돈이 있어도 투자나 부동산 같은 건 쳐다보지 않았다. 90년대 서울로 올라가 장사를 했다면 강남에 아파트를 사도 샀을 정도로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나름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손님도 많았다. 아버지가 늘 입에 달고 사셨던 말... “장사 하는 사람은 가계를 비우는게 아니다. 손님이 언제 오실지 몰라.” 그렇게 손님 생각하는 정도의 반만 내 생각 좀 하시지...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아니라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렇게 소통이 없으니 나의 의구심과 반항심은 그 강도를 넘어서 깊이를 더해갔다. 그렇게 아버지는 내게 점수를 잃고 있었다.  


 30대가 되고 그토록 원하던, 하지만 왠지 못 할 거 같았던 결혼을 무사히(?) 했다. 아내와 나는 3살 터울의 남매를 얻게 되었고, 우리는 그렇게 부모가 되었다. 부모에 대한 여러 가지 속설들이 있다. ‘부모가 되야 어른이 된다.’, ‘애를 낳아봐야 인생을 알게 된다.’, ‘사춘기 자식 안 키워봤으면 말을 하지마라.’ 등 고만고만한 말들이 즐비하다. 그렇지만 30대가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이나 키우게 된 나는 여전히 어른이 되었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았고, 인생을 알게 되기는커녕 더 혼란스러워졌으며, 아이들이 이제 사춘기가 되어가니 좀 더 있으면 할 말이 생기려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이런 어지러움 속에서 문득 아버지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대로 보려고 애써보았다. 아버지의 외로움과 노력과 헌신, 아버지가 보여준 책임감과 성실함... 사전에 나오는 아버지의 정의도 아니요, 다른 누군가의 아버지도 아닌 나의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였다. 그때부터 이전에 갖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의구심과 반항심은 온데 간데 없어졌다. 그 자리에는 감사와 존경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혼 하고 난 후 나는 아버지를 내 핸드폰에 ‘존경하는 아빠’라고 저장해두었다. 어른이 되고나서야 당신의 노고와 눈물을 아주 조금이나마 알겠다는 뜻의 존경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아빠가 필요했고, 아빠가 된 나에게 여전히 아빠의 빈자리가 사무치게 아쉬웠음을 상징하는 아빠다.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지금. 이 먼 이국땅에서 나는 지금 아빠가 진짜 보고 싶다. 존경은 잠시 내려놓고... 내 유년시절에 아주 잠깐씩 나에게 장난을 걸고, 농담을 하셨던 그 아버지의 모습들이 지금 나에게 아주 많이 필요하다. 장난치고 놀다가 지쳐 배고파서 서로 햄버거 하나 때리면서 콜라 마시고 트림 한 번 시원하게 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10대 때 부재했던 아빠의 존재감이 살아날까? 글쎄, 그럴 리도 없고, 45년생인 내 아버지에게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겠지. 혹시 그래서 내가 내 아들에게 그러고 있을까? 


 얼마 전에 장인, 장모님과 이곳에 온 조카 녀석이 내가 아들에게 장난치는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고모부는 애 같애요~”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다. 내 아들과 있을 때는 더더욱. 내 아버지가 그렇게 해주셨길 바라는 그 모습, 나에게 조금 더 당신의 시간을 나눠줬으면 하는 그 마음, 몸으로는 놀면서도 오만가지 말을 들어주려는 노력. 내 아들 앞에 선 나는 내가 아니라, 내 아빠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내가 된다. 그런데 그 상상 속의 역할놀이가 주인공 없는 연극이 되버릴 지경이다. 이제는 아버지로부터 정말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오는 것일까? 어쩔 수 없이라도 내 아빠에게 아쉬웠던 점을 보충해주는 내 아들의 아빠가 아닌, 내 아들을 위한 아빠가 되고, 이제 내 아빠와는 작별을 할 시간들을 준비해야할 것인가?


 나는 지금... 언젠가, 아니 어쩌면 성큼 다가오고 있는 그날에 무서워하고 있다. 


20230117 22:59 

작가의 이전글 느는 건 연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