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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콜과 구공탄 Feb 11. 2023

사진이 담아내지 못 하는 기억

사람, 이미지, 그리고 소통

 이민 후 제대로 된 휴가를 처음을 갔다 왔다. 한국에서 부모님들이 오셔서 가능했다. 우리 재정과 여건상으로는 어림도 없을 일정이었다. 그 인상적인 휴가 일정 속에서 의외의 기억이 머리속에 선명하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던, 누구나 하고 싶어 하던 것들이 아니었다. 숙소 창가를 통해 보이던 산봉우리 두 개였다. 하늘과 지상이 가까운 이 나라를 나는 ‘구름의 나라’라고 불러왔다. 그런 이 나라의 휴가지인 이곳의 상징과 같은 두 개의 봉우리에 구름들이 걸쳐진다. 말 그대로 걸쳐진다. 두 개의 산 정상에 드리워진 구름 그림자. 워낙 강렬해서 그 이미지가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탁월한 광고주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소비자들을 겨냥한 마케팅 전략이 이런 맥락에서 이뤄지지라. 


 사진이 담아내지 못 하는 기억들이 있다. 사진으로만 재생 가능한 기억들도 있다. 그 두 봉우리의 그림자를 보며 마음이 부풀어 오르기도 하고, 멍 때리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복잡미묘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아드레날린이 뿜뿜하는 걸까? 분명 좋은 기분인데, ‘좋다’라는 말로는 절대 부족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구름 드리워진 두 봉우리는 사진으로, 기억으로 내 마음에 저장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다. 학교 다니기 전에도, 국민학교 다닐 때도,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때도. 굵직굵직한 사건들 몇몇만 어렴풋할 뿐, 소소하고 일상적이지만 그래서 더 재밌었을 법한 기억들은 남아있지가 않다. 앓고 있는 병의 영향이라고만 짐작할 뿐이다. 한 번 크게 앓으면 뇌기능에 영향을 미친다고 들었었다. 그게 아니면 왜 기억이 안 날까 애써 파보지만 딱히 기억하지 못 할 이유도 없다는 게 내 결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서 자연스레 나를 자극하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억들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지다. 사진도 이미지의 한 종류이지만, 이 이미지는 내 기억에 그냥 도장처럼 박혀버린, 지금도 생생하게 숨 쉬는 이미지들이다. 중학교 때였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교회에서 밤새 놀자고 했다. 집에서는 반대를 했고, 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열심히 놀다가 한 밤중에 화장실을 가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깨었을 때, 흰색의 둥그런 큰 시계가 가리키고 있던 4시 5분의 시침이 잊혀 지지 않는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뭔가 흐르는 느낌이 지금도 우악스럽다. 왼쪽 눈썹 옆이 시멘트 계단에 부딪히며 쓰러졌단다. 15cm가량 찢어졌단다. 시계 바로 옆에 형의 얼굴이 보였다. “괜찮나?” 걱정스러운 형의 목소리 옆으로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 흑흑거리는 흐느낌만 들렸다. 엄마였다. 그 뒤로 나는 절대 크리스마스에 교회에서 밤을 새지 않았다. 샐 수가 없었다. 겁도 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 후로 종종 크리스마스에 밤새 놀자고 하는 친구들이 있을 때면, 상황을 아는 사람은 나를 이해했고, 이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내가 그저 내성적이거나 잠이 많은 사람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또 다른 선명한 이미지는 음식이다. 이미 영화 ‘식객’이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음식이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 정서적인 파급이 충분히 다루어진 걸로 알고 있다. 40대 중반이 되며 양이 많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배고픔의 정도와 당일 식욕과 상관없이 나를 미치게 만드는 음식이 두 가지 있다. 카레와 소고기국. 카레는 그냥 오뚜기 카레로 만든 그것이고, 소고기국은 30대가 되어서야 알게 된 육개장의 정체 되시겠다. 어릴 때 이모네 놀러가면 카레를 자주 해주셨다.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여자애들뿐인 사촌들과도 곧잘 어울렸는데, 시외버스로 2시간 가까이 혼자 버스를 타고 갔던 이유 중에는 친한 사촌과 더불어 이모의 카레가 큰 이유였다. 왜 그렇게 유독 이모의 카레가 맛있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카레가 제공되는 당시의 환경과 사람들이 나에게 긍정적인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게 해주었다 정도로 추측할 뿐이다. 지금도 카레가 나오면 밥을 3공기 이상 먹는다.


 또 다른 이미지인 소고기국. 내가 자란 경상도 지역에서는 빨간 소고기국을 먹는다. 부모님은 함께 장사를 하셨다. 나이가 80이 다 되신 지금도 장사하는 사람은 손님이 찾게 해서는 안 된다, 이미 그 자리에 항상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다. 그러니 밥 차리고, 후식 먹고 할 여유 따위는 정말 사치였다. 곰탕을 한솥 끓여놓고 나가는 아줌마들을 남편들이 그렇게 무서워한다는 우스개소리도 있지만, 어릴 때 그 한솥이 나에게는 일상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 한솥에는 소고기국이 들어있었다. 쪽파 잔뜩 썰어 넣은 양념장과 함께. 아버지는 쉴새 없이 만들고, 팔고, 고쳐야 했고, 엄마는 끊임없이 손님을 맞고, 청소하고, 치워야 했다. 경제적으로 못 사는 집은 아니었던 만큼 그만큼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 희생은 자식으로서 부모를 경험할 기회의 상실이었다. 여름 피서 때나 계곡이나 이모네 갈까, 일 년 360일 이상은 죽도록 일만 하셨다. 일만 하셨어야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일만 하는 부모님, 특히 아버지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여하튼 그 소고기국은 내게 위로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소고기국을 통해 한 줄기 남아있는(?) 엄마의 관심을 먹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맛있지만, 손도 많이 가고, 다양한 재료가 들어갔던, 특히 큼직하게 썬 대파와 이제는 그리워지기까지 한 고사리 한움큼은 하루 종일 일하고 야밤에 고단한 몸으로 다시 부엌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던 엄마의 정성과 미안한 마음이 느껴지게 만든다. 지금은 육개장이라 부르는 이 소고기국은 언제, 어디서 마주하든 반갑고, 내 살을 찌우는 이미지다. 


 대부분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나는 이미지와 텍스트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글들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의 일환이다. 종종 예전에 내가 어땠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 떠올리고 싶은데, 아무런 기억이 없다. 지나온 것은 알면서도, 디테일은 전혀 모르겠는 시외버스 창밖의 풍경처럼 말이다. 그 후로 기록을 남기는데 강박적인 면이 발달했다. 핸드폰 메모장에 20개 이상의 카테고리를 만들어놓고, 계속해서 뭔가를 쓴다. 문득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 업무 내용, 공부할 내용, 책 읽은 내용,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아이들을 왜 야단쳤는지 등. 그리고 어딜 가나 사진을 찍는다. 이런 것까지 찍나 싶은 피사체들을 핸드폰에 담아둔다. 기록을 남긴다고 해서 좋은 카메라를 산다거나 내 전용 문구류를 구비하는데 관심을 두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어떤 생각과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기억하는데 도움만 되면 되니까 말이다. 


 사진과 글로만 다시 만날 수 있는 내가 있다. 내 모습을 잊지 않고 싶은데, 잃지 않고 싶은데, 쓰지 않으면, 찍지 않으면 그 감정이 살아나지를 않는다. 사진이 담아낼 수 없는 기억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내 오감이 반응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렬했던 이모의 카레나 엄마의 소고기국 정도였을 것이다. 이번 휴가 때 본 구름 그림자 가득했던 두 개의 산봉우리가 철저히 그런 것처럼. 


2023021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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