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의 책장 #22, <아무도 없는 바다>
삶이라는 글자를 풀어쓰면 사람이다.
단순히 한 사람의 생을 의미하기보다는,
생애 동안 끊임없이 수많은 사람을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거다!'
책장을 훑어보던 중, 내 시야를 사로잡은 단 두 문장. 이 두 문장은 책을 사서 집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마 구매하지 않았으면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헤집었을 두 문장. 간혹 촤르륵 넘어가는 책장의 틈새를 비집고 나의 시야를 단단히 붙들어두는 구절이 나타난다.
'삶'. 사전적으로 풀어써보면 '사는 일 또는 살아있음', '목숨 또는 생명'이다. 모음과 자음을 쪼개보면 ㅅ, ㅏ, ㄹ, ㅁ. '사람'을 구성하는 자/모음과 같다. 사람들은 살다 보면 으레 '나는 왜 살아 가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 가는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 던져보곤 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각자의 질문 끝에 자신의 '생명이 유지(살아있음)'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참 재밌는 단어다. 살아가는 것 그 자체로는 너무 시시해진 탓일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움직이며 다양한 삶의 형태를 만나기 위해 노력한다.
더 이상 나는 사람을 '만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겪어낼' 것이다.
'사람을 다양하게 만나봐.'
으레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혹은 연애 상담을 할 때에 종종 쓰거나 들려오는 표현이다. 물론 나도 즐겨 사용했던 문장이기도 하다. 지금에서야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마주해야 하는 사람과 나의 삶 사이에 처져있는 거대한 울타리 하나를 두고 빤-히. 어떠한 동작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빤-히 바라만 보기만 했고, 또 그 빤-히 쳐다만 보라는 뜻으로 이야기했던 건 아니었을까. 나쁜 말로는 사람을 '잰다'라고 할 수 있는.
결코 그게 아닌데.. 서로의 울타리를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가며 삶과 삶이 맞닿을 수 있는 경험을 겪어보라는 것이었는데.. 하지만 나 또한 그랬던 적이 숱하게 있었기에 오히려 내면 속 무의식으로부터 이러한 뜻이 내포되어 있길 바랐던 건 아니었을까.
'삶'의 조각조각이 모여 '사람'이 만들어지고, 또 여러 사람이 모여 하나의 '삶'을 형성하듯. 나는,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다양한 사람을 겪으며, 나만의 삶을 만들어감과 동시에 서로의 삶을 공유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