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교정과 내려놓기 사이, 그 어딘가에서 #16
길랭바레증후군, 열여섯 번째 이야기
○ 2022년 11월 둘째 주
그동안 힘을 주는 그 어떤 시늉을 해도 힘이 들어온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던 왼쪽 발가락과 앞꿈치에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왼발엔 또 다른 새로운 출발이 시작된 셈.
이제 막 느껴지기 시작한 미세한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당장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보행보조기를 활용하여 걷는 연습을 한다.
"선생님 저 상체에 힘이 좀 덜 들어가는 거 같아요."
"다리에 힘이 점점 돌아오고 있다는 거예요. 근데 밍님 골반이 뒤로 자꾸 빠져요. 골반 빠지지 않게 엉덩이에 힘 꽉 주세요."
병동 복도를 한 바퀴 거닌 뒤 치료베드로 돌아온 후 자세교정을 받는다.
"밍님 한 발 앞으로 내밀어보세요. 자 내민 발에 체중을 실어보세요."
"이렇게 하면 되나요?"
"아뇨. 몸만 앞으로 오시면 안 돼요. 엉덩이로 같이 앞으로 나와야죠."
"오 넘어질 거 같아요."
"아니에요. 안 넘어져요. 앞 발에 체중 더 실으세요. 더더."
"오오오 넘어진다 넘어진다."
"아니에요. 겁먹지 마세요. 안 넘어져요. 자 다시."
"선생님, 근데 힘이 풀려서 그런지 골반이 빠지기 시작하는 거 같아요."
"조금 쉽시다. 일반인도 힘이 풀리면 골반은 빠지기 마련이에요. 그땐 쉬면 됩니다."
이 느낌을 잘 기억하라는 치료사의 말.
치료사에게 교정받은 자세를 의식하며 복도를 나 홀로 열심히 거닌다.
이전에 비해 상체로 버티는 힘이 덜 들어감에도 아직까지 많은 힘이 들어간다.
그렇게 걷는 와중 복도에서 주치의를 마주친다.
"밍님 자세 많이 좋아지셨네요."
"네. 이전엔 백니 현상도 있었는데, 치료사 선생님들께서 자세 교정해 주시고 의식하면서 걷는 연습하고 있어요."
"아 그러시구나. 계속 자세 의식하면서 걸으시는 거예요?"
"네."
"아 그러시구나. 지금 자세 많이 좋아지셨어요. 지금처럼 계속 의식하시면서 유지해 보도록 할게요."
기억하자.
걸을 땐 골반이 뒤로 빠지지 않고 상체와 같이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어야 함을.
골반이 옆으로 빠지지 않도록 엉덩이에 힘을 꽉 주며 버텨야 함을.
마지막으로 하나 더.
걷는 거 엄청 어렵다.
내 몸이 참 재밌는 점이 하나 있다면.
어느 정도 안전장치가 되어있는 상태라고 인지를 할 때면 치료사가 교정받은 올바른 자세가 나오는데,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겨 불안정하다고 느끼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는 점이다.
참.. 골치 아픈 상황의 연속이다.
뉴스에서 개기월식 소식이 들려온다.
안 그래도 달 구경하며 멍 때리는 것을 좋아하는 나인데, 이 기회를 놓치려야 놓칠 수 없지.
저녁을 후다닥 먹고 일찌감치 올라가 동쪽에 떠있는 달을 찾는다.
'아직 시작하지 않았군. 근데 생각보다 추운데?'
추운 게 별 대수랴. 달 구경이 더 중요하지.
그동안 밀린 웹툰을 보며 얼추 시간을 보내며 다가오는 개기월식을 기다린다.
근데... 우리나라 위도에서 개기월식이 보이던가? 아 보이는구나.
지난번 개기일식 때, 부분일식으로 보였었지. 맞겠지?
쌀쌀한 밤 날씨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7시 30분경 붉어지는 개기월식을 바라보며 멍~ 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그나저나 달 사진 진짜 맘에 안 드네.
퇴원하고 다시 자리 잡으면 폰부터 바꿔야겠다.
구경 중인 개기월식. 갤럭시 노트9론 영 맘에 드는 달 사진이 안나온다.
"밍님 추가접종받으세요?"
"아뇨. 외래 갔을 때 아주대학교병원 주치의한테 물어보니까 혹시 재발할 수도 있다고 맞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면역 글로불린 주사 때문에 크게 효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코로나 백신 추가 접종 여부를 물어오는 간호병동.
접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아주대학교병원 주치의의 소견을 같이 전달한다.
이놈의 코로나 사태는 대체 언제까지 유지될는지.
당시 다니던 직장 인사팀 담당 과장님에게 연락을 건다.
"과장님, 안녕하세요. 밍대리입니다."
"아 네 대리님, 안녕하세요. 팀장님께서 언질 주셨어요. 몸은 좀 어떠셔요?"
"조금씩 회복은 되고 있는데 생각보다 많이 느리네요. 그래도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 걸 위안 삼고 있습니다."
"아이고 그래도 8월에 연락 주셨던 때보다 나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그 사직원을 제출하려고 하는데 사유는 어떻게 적으면 되고, 결재라인은 어떻게 설정하면 될까요?"
"질병란으로 체크해 주시면 되고, 결재라인은 나오는 거 그대로 설정해 주시면 되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아, 그럼 전 질병으로 인한 퇴사처리가 되는 거죠?"
"네. 맞습니다."
"그럼 실업급여도 받을 수 있을까요?"
"아.. 그건 구직활동이 가능한 사람이어야만 해당이 되는 거로 알고 있어요. 아마 대리님 퇴사 후에 신청을 해주셔야 할 거예요. 자세한 건 관할 고용노동부로 문의하시면 될 거예요."
"아 넵, 감사합니다."
"금방 회사에 적응하시고 잘 지내시는 거 같았는데 너무 아쉬워요. 얼른 쾌차하세요!"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 될 줄 몰랐네요 허허..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질병으로 인한 사직 사유를 적어 올리고, 결재라인에 따라 착착 결재가 진행된다.
얼마 뒤 나의 사내 계정도 삭제되며, 22년 회사 생활이 마무리된다.
씁쓸하기 그지없구먼.
이런 씁쓸함은 뒤로한 채 먹을 건 챙겨 먹어야겠지?
지난주 중 평일 하루는 이모할머님께서 피자를 사다 주셨다.
지난주에 먹은 걸 왜 지금 올리냐고? 잊어먹어서..
과거의 일을 쓰다 보니 기억이 뒤죽박죽일 때가 종종 있다.
피자 너무 맛있다.
"밍아, 혹시 피자 좋아하니? 집에서 시켜 먹으려고 하는데 네 것도 같이 주문해서 가져다줄게."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려요!"
"부담 갖지 말고~ 저녁시간 맞춰서 찾아가면 되니?"
"아.. 네.. 감사합니다. 제가 치료가 5시 30분에 끝나서요!"
"아 그러니? 그럼 시간 맞춰 갈게."
"넵 감사합니다!"
그렇게 피자 두 판과 스파게티 하나를 사다 주셨다.
병실 사람들을 노나 주고 남는 것을 먹는 나.
피자 먹다 장염 나서 이 사단이 낫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어쨌든 독립변수임에는 변함이 없다.
일단 맛있게 먹자.
이번 주말엔 치킨을 시켜 먹었다.
치킨 좋아 헤헤.
선임님이 보내주신 기프티콘으로 한 마리 먹으며 인증샷도 빼먹지 않고 보냈다.
치킨은 늘 옳다.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항상 물어오는 말이 있다.
"거기 밥은 어때? 먹을 만 해? 병원식 별로지 않아?"
"아냐 난 저염식 안 먹어서 그나마 괜찮아. 염분조절이 필요한 병은 아니라 그냥 일반식 먹어."
사실 입원했을 때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었다.
저염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간이 되어있지 않은 밍밍한 그 맛을 어떻게 버티며 살 것인가에 대한 미지의 공포(?).
다행히 간은 어느 정도 다 되어 있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한 번은 주치의에게 먹는 건 상관없냐고 물어본 바 있다.
돌아온 대답은 저염식 식단과는 관련 없는 질병이니 먹는 것엔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것.
정말 한 줄기 빛과도 같은 답변이었다.
11월 중순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기.
이젠 조금씩 마음에 쌓인 것들을 내려놓는 중.
막상 사직서를 결재하니 맘이 편해지고, 빨리 나가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는 미련을 버리니 좀 더 맘이 편해지기 시작한다.
지난 3개월간 폭풍처럼 휘몰아쳤던 감정의 소용돌이.
분명 종종 이따금 휘몰아치는 경우가 있겠지만, 이것도 점차 익숙해지며 그 감정의 구렁텅이로부터 조금씩 더 빠르게 회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쨌든 길랭바레증후군으로 인한 하지마비는 찾아왔고, 당장 내일 아침에 번쩍 일어나 걸어갈 수 있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밤하늘에서 바라본 개기월식 마냥 때가 되면 일어나서 걸어갈 날이 올 것이다.
말초신경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나브로 재생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