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현실과 찝찝함 사이, 그 어딘가에서 #15
길랭바레증후군, 열다섯 번째 이야기
○ 2022년 11월 첫째 주
치료실에 비치되어 있는 가장 높은 발판을 가져오는 치료사.
오래된 건물의 가파르고 높은 계단 높이와 얼추 비슷한 높이.
발판 위에 어찌어찌 발을 턱 하니 올려놔본다. 올려지긴 올려지네.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간다.
발도 발인데 양 옆을 지탱하고 있는 팔에도 많은 힘이 쓰인다.
발로 올라가는 게 아닌, 팔로 올라가는 모양새가 되는 느낌. 그래도 올라가짐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걸 추진력 삼아 직접 계단을 오르기로 한다.
병원 건물 비상구 계단으로 질질 발걸음을 옮긴다.
병원 비상구 계단 양 쪽엔 난간이 고정되어 있다. 양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한 걸음씩 천천히 올라가 본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올라가기엔 아직 버겁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앞으로 쏠리는 몸.
"밍님 몸 세우시고, 팔에 힘 빼셔야 해요."
라는 말에 힘을 최대한 빼려 안간힘을 쓴다. 힘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다.
최대한 빼본 채 계단 하나를 올라가 본다.
왼발은 얼추 올라가지는 거 같은데, 오른발은 허벅지가 조이는 듯한 느낌이 온다는 것 말곤 올라갈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는다.
계단 앞에서 거대한 벽을 느낀다.
'이게... 일상생활? 그러니까 내가 이걸 했었단 거지?'
평일 중 오후에 팀장님께서 찾아오셨다.
외근 후 들르셨다는 팀장님.
일용할 커피 한 잔과 간식으로 먹으라며 머핀, 러스크를 건네주신다.
팀장님께서 사다 주신 사식(?)
"선임님, 몸은 좀 괜찮아요?"
"발병 초기에 비해선 그래도 나아지는 중이에요. 다만 그 회복 속도가 너무 느리네요. 주치의도 자신이 기대했던 회복 속도에 비해 많이 더딘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도 나아지고 있으니 위안 삼는 중입니다."
"나아지고 있다니 다행이에요. 처음 전화받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저도 팀장님께 전화드리면서 제가 울 줄은 몰랐어요.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일찍이 한번 찾아뵀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게 맘에 걸렸거든요."
"아닙니다. 연락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그리고 이어지는 현실적인 이야기.
어딘가 머뭇거리시는 분위기가 보이는 것 같아 내가 먼저 말을 꺼낸다.
"팀장님, 그.. 제 휴직계가 11월 중순까지인데, 현재까지의 회복세로 보아선 복귀가 힘들 것 같아 보입니다."
"아.. 그래요."
"설령 퇴원을 강행해서 한다 한들, 출퇴근할 수 없을 거 같아요. 제 자리는 꼭 비워달라 말씀드렸는데, 그러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 걱정은 하지 말아요. 우선은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선임님 회복에만 집중하기로 해요."
"네, 감사합니다."
결국은 꺼낼 수밖에 없는 이야기.
현실을 마주해야만 하는 이 모습이 어른의 삶일까. 어른하기 싫다.
"주말에 다른 선임님 찾아오실 거예요. 아마 지원업무 이후에 오는 거라 몰골은.. ^^"
어느 날에서부턴가 허벅지에 뻐근함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선생님, 허벅지가 뻐근한 느낌이 들어요."
"그래요? 통증은 없으시죠? 관절이 아프다거나, 찌르는 듯한 느낌이 있다거나 하는?"
"네. 그런 통증은 일절 없고 뻐근한 느낌만 들어요. 그리고 주말 지나면 좀 풀리는 거 같아요."
"아 그럼 근육통일 거예요. 밍님이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점차 나아질 거예요."
"오.. 근육통이면 오히려 좋죠."
"자 그럼 열개 시작~"
"네?"
"제대로 들으신 거 맞아요. 열개 시작~"
이와 함께 어느 날에서부턴가 아침에 올곧이 서있으면 땡땡한 느낌이 들던 종아리의 느낌도 옅어지기 시작한다.
근육이 붙는 건가? 늘어나고 있는 건가? 둘 다인가?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긍정적인 신호가 찾아오고 있다는 증거임에 의의를 두자.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보행보조기에 몸을 의지한 채 치료사와 걷는다.
"밍님 다리에 백니가 보이는 거 같아요."
"백니요?"
"네 다리를 붙잡아 주는 근육이 약하니까 관절에 락이 걸리고, 아예 뒤로 툭 빠져버리는 거예요."
"아 혹시 스타크래프트에 질럿 같은..?"
"ㄱ.. 그건 과한 경운데 ㄱ.. 그렇죠..?"
"어떤 건지 대충 감이 오는 거 같아요. 그럼 어떡하죠?"
"다리에 힘주시고, 무릎을 살짝 구부려볼게요. 어때요?"
"오 뭔가 방금 전까진 다리가 뒤로 쫙 펴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이 느낌 잘 기억해 주시고, 보폭 좁혀서 천천히 걸어볼게요."
신경 써야 할 게 한 가지 생긴 셈.
걷는 것도 어렵네.
주말 오후. 옆자리 선임님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선임님, 저 일 끝나고 가면 4시 30분 정도 될 거 같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편하게 오셔요"
"네, 퇴근하고 연락드릴게요!"
커피 한 잔과 함께 몰골로 찾아온 선임님.
"팀장님께서 언지는 주셨는데, 먼 곳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아 마침 근처에서 업무지원이 있었거든요. 병원이 여기 바로 앞이더라구요?"
"맞아요. 주변 건물 보니까 바로 근처에 하나 있어요. 오늘은 업무지원은 어떠셨어요?"
"하... 지금 제 몰골 보이시죠? 힘들어요 힘들어."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전부터 종일 하신 거예요?"
"네, 종일 빡빡하게 일하다 왔습니다."
"아이고. 그럼 얼른 들어가서 쉬셔야죠 ㅠㅠ"
"괜찮아요. 겸사겸사 선임님 얼굴 보고 가는 거니까요."
병세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마치고 팀장님과 나눈 현실적인 이야기를 언지한다.
"선임님. 제 자리 어쩌면 진짜 비워야 할 거 같아요."
"안돼! 어떻게 뽑은 선임님인데! 안돼!"
"저도 돌아가고 싶지만, 현실적인 걸 감안했을 땐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거 같아요. 우선 출퇴근길부터가..."
"그러게요.. 하.. 선임님 있어서 정말 힘이 많이 됐는데..ㅠㅠ"
"아유 제가 뭘요. 짐덩이만 안 됐으면 다행이죠."
"아녜요. 옆에서 진짜 많은 힘이 되어주셨어요."
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에 이어 두 번째로 현실을 마주하게 된 순간.
그리고 선임님과의 짤막한 만남도 마무리를 향해 흘러간다.
"선임님 먹을 건 어때요? 배달 같은 건 시켜 먹을 수 있어요?"
"밥은 병원치곤 맛있어서 잘 먹고 있어요. 배달도 딱히 터치는 안 하더라구요."
"오 그럼 뭐 먹고 싶은 거 보내드릴까요?"
"헤헤 맘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니 진짜 하나 보내드릴게요."
"헉 그럼 저 치킨이요!"
기프티콘을 보내주겠다는 말과 함께 귀갓길에 오른 선임님.
퇴원하면 꼭 연락 달라고, 같이 밥 먹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각자의 길을 향해 간다.
으레 하는 안부인사가 아닌, 진심으로 그날이 오길 손꼽아 기다리며.
어른의 삶은 무척이나 맘에 들지 않는다.
급작스레 찾아온 병 하나로 인해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잃어버리게 생겼음을 실감하게 된 한 주.
짐작하고 있던 썩 유쾌하지 않은 내용을 막상 현실이 되어 닥쳐옴을 실감했을 때의 그 기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낼 것임을 분명 알지만, 그 과정은 썩 유쾌하지 않다.
난 어른의 삶이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