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 피우기와 편지 한 부 사이, 그 어딘가에서 #30

길랭바레증후군, 서른 번째 이야기

by 밍밍한 밍

○ 2023년 2월 셋째 주


"밍님 양반다리 가능하세요?"

"그럼요. 가능하죠."

"그 자세에서 한번 일어나 보도록 할게요."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과 같이 양반다리에서 자연스레 일어나는 건 도통 불가능했기에, 단계별로 구분 지어 동작을 수행해 본다.

1단계 : 양손을 바닥에 짚기 - 2단계 : 오른발 세우기 - 3단계 : 왼발을 마저 세워 쪼그려 앉기 - 4단계 : 일어나기

발병 전엔 별거 아닌 것 마냥 훅훅 일어나던 자세였으나, 지금은 4단계를 거치고 나서야 일어나는 시늉이 가능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신경이며 근력이 돌아오긴 했구나.


"오 진짜 되네요?"

"아니 선생님이 놀라시면 어떡해요!"

"진짜 하실 줄 몰랐거든요!"

"예?"

"에이 어쨌든 잘 해내셨잖아요. 허리에 무리는 없으시죠?"

"네. 처음 쪼그려 앉기 했을 때에 비해선 허리에 무리도 확실히 덜 가는 거 같아요. 아니 거의 없는 거 같기도 하구요."

"확실히 다리 근력이 는 게 보이네요."

"다 훌륭한 치료사 선생님들 덕분이죠."

"아이 또 왜 그러실까~"


그리고는 콩주머니가 한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오더니 그대로 바닥에 냅다 쏟는 치료사.


"선생님 그거 아니죠?"

"네? 그거 맞아요."

"아하..."


나름대로 요령을 피운다고 한 번에 2~3개를 집어 바구니에 넣으려는 찰나


"에헤이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네? 아니~ 효율성 효율성~"

"에헤이 이 싸람이 지금! 다시 바닥에 내려놓으세요."

"네..."


효율성을 가장한 요령은 씨알도 안 먹히네 :(




"밍님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기 한번 해볼까요?"

"오른쪽 축이 되면 그나마 안정적이긴 한데, 왼쪽은 아직 불안 불안하네요."

"그러네요. 그래도 지난번에 비하면 전체적인 균형 점수가 많이 올랐어요."

"다 훌륭하신 선생님들 덕입니다."

"헤헤. 감사합니다. 요즘 지팡이로 짚고 걷는 건 어떠세요?"

"최근 시도는 해보지 않았는데.. 한번 해볼까요?"

"좋아요! 제가 옆에서 보조해 드릴게요."


치료실에 비치되어 있는 지팡이를 사용해 조심스레 한 발자국씩 떼 본다.


"밍님 어떠세요? 걸을만한 거 같으세요?"

"네. 선생님이랑 처음 지팡이로 걸었을 땐 허리에 엄청 부담이 왔었는데, 지금은 좀 덜한 거 같아요."

"오 좋아요. 그럼 이제 제 시간엔 지팡이로 병실까지 걸어가는 거로 마무리할게요."

"네 좋아요."


아직까지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건 사실이나, 그래도 이것도 적응해야 하긴 할 터. 혼자서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니기엔 아직 무리가 있는 것 같아 치료시간의 끝자락에나마 치료사의 동행 하에 지팡이를 이용해 걸어본다.

짧지만 온몸에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의 연속이 이어진다. 그래도 넘어지지 않고 어찌어찌 병실까지 돌아오긴 하네. 장하다 내 다리.




한 발을 앞으로 내딛고, 앞으로 내디딘 다리에 체중을 싣는다.


"밍님 백니 일어나지 않게 조심하세요."

"넵."


왼쪽 허벅지는 이미 튼튼의 경지에 다다랐으니 백니가 일어날지 만무하다만, 오른쪽 허벅지는 백니가 일어나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한 그 애매한 중간 선상 어딘가에서 묘한 줄타기를 선보인다. 그 상황에서 추가 주문이 들어온다.


"밍님 내디딘 다리에 체중을 싣게 되면 자연스레 뒷발이 따라 올라오게 되어 있거든요."

"왼발을 내디딜 땐 오른발 발목이 자연스레 올라오는 거 같아요."

"오 맞아요. 지금 잘하셨어요. 반대로 하면, 왼발목에 힘이 없어서 지금 안 올라오실 수도 있어요."

"맞아요. 바닥에 달라붙어있네요."

"이걸 억지로라도 살짝 들어 올려볼게요."


파들파들 떨려오는 왼쪽 발목과 종아리. 뭐지? 이건 근육이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왼쪽 발목을 살짝 들어 올림과 동시에 골반이 틀어진다. 이유인즉슨, 발을 세웠을 때 버틸 앞꿈치며 발목, 종아리의 힘이 총체적으로 부족함에도 오는 보상현상이었다.


"밍님 몸 틀어지지 마시구요."

"살려주세요."

"에이 누가 들으면 못살게 괴롭히는 줄 알겠어요~"

"살려주세요."

"자 5초만 더~"


그 뭐라 해야 할까. 힘은 주고 싶은데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답답함. 차마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그 답답함이 물밀듯 몰려온다. 덩달아 오른쪽 허리에 뻐근함이 오는 건 덤.


"밍님 할만하시죠?"

"네?"

"에이~ 할만하시잖아요~ 그래도 힘은 없지만 발목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게 보여요."

"살려주세요."

"자 자리에서 일어나시고 한번 더 해볼게요."

"헝."


머리론 힘이 들어갔고 동작도 잘 수행하는 모습이 그려지나, 정작 실상은 파들파들 떨려오는 발에 제멋대로 틀어지는 몸뚱이. 이 괴리감도 반년 넘게 지속되다 보니 이젠 그냥 그려려니 한다. 안 하는 건 아닌, 못 하는 걸 어떡하겄어. 그래도 해볼 수 있을 때까지 해봐야지.


평행봉에서 왼발을 뒤로 쭉 들어본다. 이거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는 게 맞는 거겠지?


"발 뒤로 들 때 발이 안쪽으로 틀어지면서 들어지면 안 돼요. 일자로 쭉 들어야 해요."

"근데 자꾸 틀어져요."

"알아요. 그래서 시키는 거예요."


대체 내가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거람.


"그래도 예상했던 것보다 잘하시네요."

"근데 문제가 생겼어요."

"어떤 문제요?"

"왼쪽 내전근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생겼어요."

"아 왼쪽 엉덩이에 힘으론 다리를 들어 올리지 못하니까 그쪽 힘을 끌어다 썼나 봐요. 좀 풀어드릴까요?"

"아뇨아뇨아뇨아뇨. 쉬면 나아지겠죠."

"에이 이번 시간 운동 쉬고 쭉 풀어드릴게요."

"아뇨아뇨아뇨아뇨. 아녜요. 그냥 운동할게요."


살려..줘..




주말에 반가운 편지가 도착했다. 월요일에 발송하고 꼬박 닷새 뒤에 받은 편지 한 부. 서로 이거 오는 게 맞냐고, 도중에 분실된 거 아니냐고 의아해했던 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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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속 어린 왕자와 여우, 그리고 유리병 속 장미 한 송이.


어린 왕자로 연락을 주고받게 된 친구로부터 온 손 편지. 얼마 만에 받아오는 아날로그 감성인지.

주말 오전 치료를 마침과 동시에 원무과에서 편지를 수령한 후, 그 자리에서 3회독을 한다.

엥? 그런데 편지라기엔 부피랑 무게가 좀 있는 게 편지만 있는 게 아닌데? 대체 뭐지? 싶어 주섬주섬 짐을 풀었을 때 나온 책 한 권.

병실 옆 사물함의 책들이 여럿 대체되었음에도 아직까지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KakaoTalk_20230623_094854915.jpg 손편지와 함께 도착한 책 한 권.


학수고대가 있다면 이 편지를 두고 한 말이렸다. 아날로그 감성과 함께 물들어가는 2월의 어느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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