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꿈과 새 친구 사이, 그 어딘가에서 #29

길랭바레증후군,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by 밍밍한 밍

○ 2023년 2월 둘째 주


"밍님 한 발 서기 가능하세요?"

"어.. 그거 한쪽 발이 아예 바닥에서 떨어지질 않더라구요."

"흠 그래요?? 그럼 밸런스볼에 발 올려둬 보는 건 가능하시겠어요?"

"그건 안 해봤어요. 한번 해볼게요. 근데 보조테이블에 손을 올려둬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그럼요."


치료실 내 밸런스볼과 보조테이블 하나를 들고 오는 치료사. 가져온 밸런스볼 위에 한 발을 올려놓는다. 하지 힘이 없다 보니 발을 들어 올리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집중이 필요하고, 행여나 중심을 잃고 넘어지진 않을까 찰나의 긴장감이 스쳐 지나간다. 밸런스볼 위로 발이 놓임과 동시에 긴장이 풀리긴커녕, 익숙하지 못한 자세에 몸의 긴장강도는 더욱 강해져만 간다.


한 손을 보조테이블에 올리고, 발판에 한 발을 올린 채 가만히 서있기만 할 뿐임에도 사시나무 떨듯 파들파들 떨리는 몸.


"밍님 몸에 긴장 푸세요. 전체적으로 몸이 다 굳어있어요. 심호흡 한번 해볼게요."

"후. 와 이거 고개를 돌릴 수가 없는데요."

"별 거 아닌 거 같은데 엄청 힘들죠?"

"네. 별 거 아닌 게 아니네요."


오른발 왼발 각각 번갈아가며 밸런스볼에 발을 올려보며 각 발의 차이를 실감한다.

오른발이 올라가 있을 땐 엉덩이에 받쳐지는 힘 덕분에 조금이나마 균형을 잡을 수 있던 반면, 허벅지 원툴인 발이 올라가 있을 땐 허벅지로는 잡을 수 없는 균형감각에 행사용 풍선이 된 것 마냥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일쑤. 세상 쉬운 동작 하나 없다.


33af0f98-c7c5-4bd2-bb42-4cc151df0503.png 밸런스볼(하프짐볼, 보수볼)이라는 새 난관을 경험하게 됐다.




여느 때와 같이 SCI FIT을 돌리는 와중에 왼쪽 허벅지 골반이 툭툭 빠지는 느낌이 감돈다. 다행히 아프다는 통증은 없었고, 그저 뼈가 툭 빠지는 느낌이 강렬하게만 느껴진다. 허벅지 힘은 오른쪽이 훨씬 약함에도 오른쪽은 이 현상이 일절 일어나지 않았다.

치료사와 주치의에게 번갈아 물어보니 다리를 돌리는데, 골반 힘이 버텨주질 못하니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답변을 듣는다. 차츰 근력이 붙으면 해결될 수 있는 현상이고 당장 통증이 있는 건 아니니, 이런 현상이 또 발생하면 잠시 쉬어가며 돌리는 것이 좋다는 말과 함께. 때는 이때다 싶어 얼른 허벅지를 감싸 안은 세라밴드를 손수 풀어버린다.

휴. 이제야 좀 살 거 같다.


증상은 증상대로 나타나는 와중에 어느 시점부터 SCI FIT을 돌리는 시간에 허전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SCI FIT을 돌리는 시간이면 늘 온갖 욕설(?)을 난무하시던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퇴원하셨나 싶어 여쭤보니 상황이 위독해져 구급차를 타고 타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다고. 아이고..

글을 쓰는 이 시점엔 다시 지금의 병원으로 돌아오셔서 다른 층에 머물고 계시단 소식을 들었다. 상황이 호전되셨다니 다행이다.



"내 꿈에 너 나옴."

"대체 무슨 꿈을 꾼 거야. 내가 왜 네 꿈에 나와."

"꿈속에서 네가 퇴원시간 7시간 남았다고 함."

"오."

"오."


이게 뭐람. 친구들이 있는 단체톡방에서 대뜸 꿈 이야기가 나오더니, 퇴원시간이 7시간 남았다며 설레발치는 내 모습을 봤다는 친구.

그날도 이제 드디어 보인다 보여. 기억해 놨다가 퇴원하는 날 7시간 전에 써먹어야지. 밍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그리고 어린 왕자 전시 4월 30일까지임."

"전시? 어린 왕자 전시를 어디서 하길래?"

"띠아트 홍대라는 곳에서 4월 30일까지 한다더라."

"인스타용 전시 느낌 냄새나는데.. 몇 년 전에 K-현대미술관에서 했던 거 같다가 엄청 실망하고 나옴."

"그래서 안 갈 거임?"

"퇴원하면 가보긴 할걸. 어린 왕자는 못 참지."


어린 왕자를 제일 좋아하는 날 위해 돌아다니다 얻은 전시 정보를 알려준 친구. 퇴원한다는 전제 하에 가보고 싶단 마음이 듦과 동시에 가면 분명 실망만 하고 올 것이라는 김칫국을 와장창 마셔본다. 해당 전시는 가지 못했다. 지금도 입원은 계속 진행 중이니까.




무릎 꿇고 스쿼트를 하는 와중에 약간의 변형을 준다.


"밍님 끝까지 내려가지 말고 중간까지만 내려갔다가 버티고 다시 올라오시면 돼요."

"네?"

"그냥 하는 건 이제 잘하시잖아요~ 더 힘들게 해야죠."

"네?"

"네? 가 아니라 할 수 있어요. 자 10개 시작~ 오른쪽 허벅지도 이제 슬슬 일을 좀 하기 시작하네요."

"하 살려주세요."

"네? 무슨 일 있었어요? 에이~ 이렇게 편하게 하는 시간이 또 어딨어요~ 쉬는 시간 많이 주잖아요."

"하... 살려주세요."


허벅지 터질 거 같다 진짜... 누가 나 좀 살려줘...

이어지는 다른 치료사 시간엔 여전히 휠체어에 탄 치료사를 끌고 병원을 돌아다닌다.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그렇지만, 몸이 회전을 할 때 상체에 실리는 긴장감이 장난 아님을 느낀다.


"밍님 회전할 때 팔에 힘 엄청 들어가는 거 아세요?"

"네. 회전할 때 몸에 힘 엄청 들어가요."

"그쵸. 팔도 엄청 떨려서 그게 다 느껴지는 정도예요. 호흡 참지 마시고 같이 해주세요. 호흡도 중요해요."

"네. 알겠습니다."


살짝이라도 몸을 움직일라치면 이것 저것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원하는 다리에 힘이 제대로 실려있는지, 하체뿐만 아니라 상체 역시 잘 따라오고 있는지, 무게중심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 상체에 힘이 과도하게 들어가진 않은지, 호흡은 잘하고 있는지 등등. 아 나도 빨리 이런 거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싶다.




마법사 세계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 하나 출시됐다. <호그와트 레거시>

해리포터 소설 전 권을 10번 이상 읽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고, 해리포터 마법사 세계관 속의 나를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던 사람으로서 이걸 어떻게 놓칠 수 있으랴. 금액은 안중에도 없다. 일단 구매하고 플레이를 해본다.


시간대 상으론 해리포터 이전의 시간대이지만, 소설 속 등장했던 반가운 이름들이 눈에 보인다. 지팡이 상점의 올리밴더, 호그와트 교장이었던 피니어스 나이젤러스 블랙, 호그와트 유령인 목이 달랑달랑한 닉 등.

호그와트와 그 일대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재밌는 시간을 보낸다. 주변에도 추천하기 바쁘다. 이건 해리포터와 관련된 게임 중 역대급이라고. NPC와의 상호작용은 아쉽지만, 그 외 맵 속에 살아있는 디테일들이 장난 아니라고.

(물론 버그도 갓겜이다. 지금은 패치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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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그와트 전경으로 시작되는 인트로는 감동이었고, 시간대에 따라 변하는 호그와트 역시 감동이었다.


동시에 친구들에게 얘기하는 나.


"그리핀도르 출신 어둠의 마법사? 이걸 어떻게 참아."

"설정상으로도 그리핀도르 출신 어둠의 마법사가 두 번째로 많긴 하지."

"그치. 그리핀도르의 용기. 어둠의 마법사로 타락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 이게 그리핀도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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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도르 출신 어둠의 마법사. 그것이 진정한 '용기'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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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성물 퀘스트는 동화풍의 무채색으로 배경에서 진행된다. 설정에 충실한 게임을 플레이하니 퀘스트 하나하나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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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마법생물을 만나고, 기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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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와 히포그리프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다.




안부를 서로 물어볼 수 있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됐다. 그 친구랑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으면 괜스레 맘이 밝아지는 기분이 든다. 사뭇 관심 없는 분야의 것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 기울여 들어주는 모습을 보고, 사소한 이야기 하나에도 몸소 귀 기울여 들어주는 모습을 보며 새삼 본받을 점이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처음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을 때, 친구는 기분이 안 좋았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때마침 어린 왕자의 구절이 떠오르며, 해당 구절을 인용해 친구의 이야기에 공감을 표했다. 아마 이런 표현이어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음이 울적했을 때, 밤하늘의 모든 별들도 슬픔에 잠겨있었겠구나.'


이 표현에 이게 진짜인지 혹은 그저 공감하는 표현을 하기 위한 가면인지 의구심을 품었던 친구. 이내 어린 왕자에 대한 내 진심을 알았는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 이후 이상하리만치 급속도로 친밀감을 쌓아간 친구.


내가 귀인을 만났구나 싶을 정도로 많은 영감을 가져다주는 소중한 친구가 한 명 생겼다.

KakaoTalk_20230619_092438901.jpg 어린 왕자를 제일 좋아한다는 말에 그림을 그려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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