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벅지의 벽과 추억 보정 사이, 그 어딘가에서 #28

길랭바레증후군,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by 밍밍한 밍

○ 2023년 2월 첫째 주


"선생님 레그 익스텐션 중량 올려볼 수 있을까요?"

"가능하시겠어요?"

"한번 해보죠."

"가즈아."


자만과 오만으로 얼룩진 나의 욕심이여.

중량을 한 단계 올림과 동시에 5개만 해도 더 이상 올라가질 못하는 내 오른쪽 허벅지여..

왼쪽은 올라가는데 왜 오른쪽은 그러질 못하니! 기구가 자기 좀 올려달라 아우성치는데 왜 그러질 못하니!


"밍님 평행봉으로 갑시다."

"후.. 가야죠."

"허리로 들어 올리지 마시고, 왼쪽 엉덩이가 힘 빡 주세요."

"헝."


어기적어기적 평행봉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데에도 이어지는 자세 피드백. 나름대로 힘을 쥐어짜 내며 버텨보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느낀다. 아니 난 분명 힘 다 쥐어 짜낸 건데.. 분명 다 쥐어짜 낸 건데..


"밍님 어떤 거 할지 감이 오시죠?"

"네. 그거 하면 되는 거죠?"

"역시 잘 아시네요. 오늘은 5개 도전해 볼까요?"

"후 좋습니다. 5개 가시죠."

"팔에 힘 최대한 빼시고, 하체 힘 많이 주시고, 다리 모아지는 거 주의해 주세요."

"넵."


습~ 후~ 심호흡을 크게 들이쉬고 쪼그려 앉기를 5개 연달아 시도한다. 3~4개까진 어찌저찌 다리 힘으로 최대한 쥐어짜 내서 일어나겠는데, 마지막 5개째에 힘이 풀려버리며 팔에 힘이 절로 많이 들어가지더라.

그걸 놓칠 리 없는 치료사의 한 마디.


"밍님 마지막에 팔 힘 많이 주셨죠?"

"네. 다리 힘이 훅 풀려버리네요."

"그래도 지난번보다 개수 늘었네요. 처음 시도했을 땐 2개도 힘들어하셨잖아요."

"맞아요. 그 사이에 근력이 더 생겼나 봐요. 다 훌륭한 선생들님 덕분입니다."

"에헤이. 또 왜 그러실까."

"아니 진심이에요 진심.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알죠 알죠."


연이어 허벅지에 근육통이 찾아온다. 입원 전의 근육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입원 전 헬스를 하며 얻은 근육통은 조금만 움직여도 아플 정도의 근육통이었다면, 재활병원에서 얻는 근육통은 아픔은 없고 뻐근함이 제일 크다. 조금만 움직여도 뻑적지근해지는 그런 근육통. 그래도 주말 동안 쉬면 나아지니까~ 이젠 어떤 느낌인지 아니까~


치료실의 가장 높은 발판에 발을 올려놓고 올라가 본다. 그 높이로 치면 옛 건물 높이 수준의 것이다. 근래 힙지로라 불리는 을지로의 건물 내 큼지막한 계단 높이쯤 된다.

왼 다리는 허벅지 원툴임에도 생각보다 별 무리 없이 몸이 잘 올라가진다. 반면 오른 다리는? 택도 없어~

골반, 종아리 등이 왼쪽보다 상대적으로 좋아도 몸을 꽃꽂이 세운 채론 저언혀 올라가지지 않는다. 그나마 상체를 비스듬하게 숙여 무게중심을 앞으로 옮긴 후, 팔에 힘을 가득 실어줘야 겨우겨우 올라가지더라.

계단 올라가는 건 허벅지의 개입이 매우매우매우매우 크다는 걸 절실히 체감한다.




옆자리 중국인이 옆 병실로 이동했다. 몇 개월 만에 느껴보는 조용함인지.. 아닌 새벽에 비닐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는 것 없이, 새벽 소음공해 없이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음을 체감하는 순간.

행복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온다.


"밍아 네가 말한 그 사람 새벽에 조용하던데? 요즘엔 서랍도 열어놓고 자."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저 있던 병실에 있을 때 제가 그거로 난리 쳐가지고 이젠 서랍 열어두고, 소리도 안 내려고 하려나 보네요."

"그럴 수도 있겠다. 근데 생각보다 조용해."

"바로 옆자리는 근데 또 몰라요. 안 그래도 지금 그 사람 옆 자리 환자분이 저 볼 때마다 그 중국인 새벽마다 부스럭부스럭거린다고 하더라구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

"화이팅입니다."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여 점심에 땅콩 한 봉지가 나왔다. 부럼 까먹으라고 나온 것이 확실하다. 평소엔 나오지도 않으니까. 지난 설엔 약과가 나오고, 동지땐 팥죽이 나오더니(근데 탄맛이 강해서 한 입도 제대로 안 먹고 고스란히 내놨다.) 은근 명절 때마다 이런 게 잘 나오는 거 같단 말이지?


덩달아 마카롱을 공수받아 커피 한 잔과 함께 즐기는 여유를 선보인다. 음~ 스멜~

KakaoTalk_20230618_190118982.jpg
KakaoTalk_20230618_190118982_02.jpg
정월대보름으로 나온 부럼과 마카롱, 커피의 조합으로 여는 아침




카트라이더 드리프트라는 게임이 오픈했다. 기존 카트라이더의 자체 엔진을 언리얼 엔진으로 변경, 이식한 게임. 오픈과 동시에 어렸을 때 했던 그 기억을 되살려 다시 카트라이더를 해보고 싶단 생각에 재빨리 설치했다. 새로 나왔다는데 찍먹은 해봐야지.


아는 동생도 한 명 꼬셔 같이 듀오를 돌려보고, 서로 약올로가며 단 둘이 플레이를 즐기기도 한다. 역시 게임할 때의 입딜은 늘 즐겁다. 늘 새로워, 늘 짜릿해, 늘 최고야.

KakaoTalk_20230618_194543495.jpg 잠시나마 추억을 즐길 수 있었다.


어딘가 많이 느린 듯한 느낌을 받으며, 추억 보정 가득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던 지난 며칠.

며칠간 조금씩 빨라지는 기록을 보며, 혹시 나 재능 있는 거 아닐까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이내 마음을 접길 정말 잘했다는 느낌이 든다.


추억은 추억으로 묻어두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

keyword
이전 08화새로운 기구와 훈훈함 사이, 그 어딘가에서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