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랭바레증후군, 스물여섯 번째 이야기
"밍님 저 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어떤 건가요?"
"여기 제가 가져온 보조테이블 밀어볼까요?"
"흠.. 할 수 있겠죠?"
"그럼요. 할 수 있을 거예요."
드드드드드드드. 보조테이블의 강한 진동과 함께 치료실 전체로 확장되어 가는 보조테이블 다리와 바닥 간의 마찰 진동.
엣헴 환자가 끌고 가는 보조테이블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외치는 듯 진폭의 세기가 상당하다.
"밍님. 팔에 힘 빼면서 미셔야 해요."
"네? 저 지금 팔에 힘 빼고 있는 건데요?"
"아니에요. 지금 팔에 엄청 힘주고 계신 거예요."
"엥? 한번 보여주실 수 있으실까요?"
"잘 보세요."
치료사와 내가 자리를 바꿈과 동시에 보조테이블의 진동 역시 거의 없다시피 하며 그 자리를 이동해 간다.
"우와. 이게 이렇게 될 수 있는 거예요?"
"아이 참. 당연하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밍님."
"아니 전 제가 끌 때처럼 소리 나는 게 당연한 줄 알았죠."
"이제 아셨죠?"
"네. 다시 한번 해볼게요."
드드드드드드드. 엣헴~ 환자가 끌고 가는 보조테이블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다시 내가 끎과 동시에 존재감을 뽐내기 시작하는 보조테이블. 그 존재감에 치료사와 나, 둘 다 실소가 터진다.
이번 달도 어김없이 돌아온 평가주.
한 가지 가장 큰 변화가 생긴 점이 있다면, 드디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볼펜을 주울 수 있게 된 점이다.
조금만 상체를 숙이거나 다리를 굽히기만 해도 주저앉기 급급했으나, 신경이 조금씩 회복되고 근육이 조금씩 붙기 시작하며, 드디어 바닥에 있던 볼펜을 주울 수 있게 됐다.
볼펜을 줍는 그 순간 똥~그래지는 치료사의 눈.
그리고 이게 왜 됐을까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의 눈.
"와! 밍님! 바닥에 있는 것도 주울 수 있으시네요? 진짜 많이 좋아졌어요. 제가 다 감격이에요."
"다 훌륭한 치료사님들 덕분입니다. 허허."
덩달아 휠체어 의자정도 높이의 위치에서 손을 자유로이 둔 채 일어날 수 있게 됐다.
코어도 기립근도 다리도 조금씩 튼튼해져 감을 차츰차츰 느끼기 시작한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바닥에 떨어진 공을 주워보자는 다른 치료사.
"밍님 바닥에 있는 공 주울 수 있으시겠어요?"
"며칠 전 물리평가 했을 때 바닥에 떨어져 있던 볼펜 주웠었어요."
"오 대박! 진짜요? 그럼 바로 할 수 있겠네요."
와르르.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구니 속 콩주머니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거 그거 맞죠? 운동회 때 쓰던 그 콩주머니."
"어 네 맞아요. 밍님도 박 터트리기 하셨어요?"
"에이. 선생님. 우리 같은 세대예요."
"아니 무슨 말씀이신지~"
치료시간 직전, 오른쪽 새끼발가락 발톱에 있던 거스러미가 거슬려 확 잡아 뜯었다.
웬걸 피가 나네.
"밍님 갑자기 웬 피가 나요?"
"아 이거 새끼발가락 발톱에 있던 거 잡아 뜯었어요. 그래더니 피가 나네요."
"간호병동 와서 소독하고 오세요."
"치료받는 데 지장 없지 않을까요?"
"그렇긴 해도 이렇게 피가 철철 나는데 소독하고 밴드는 붙이고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냥 해도 될 줄 알았는데..
잔소리 한마디 들은 후 휠체어를 끌고 간호병동으로 향한다.
"밍님 무슨 일이에요?"
"아 저 새끼발가락 소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이고 어쩌다 피가 이렇게 나요. 괜찮으세요?"
"새끼발가락에 있던 살 뜯었거든요. 헤헤. 아프거나 하진 않아요. 치료사가 보더니 소독하고 밴드 붙여오라고 해서요."
"조심하시지. 금방 소독하고 밴드 붙여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거스러미 사건이 끝나나 싶었다.
다음 날 아침, 오전 작업치료사가 발가락을 보더니 한 마디 한다.
"아니 밍님 발가락 무슨 일이에요? 어디 찧었어요? 안 아프세요?"
"괜찮아요. 안 아파요. 이거 어제 새끼발가락에 있던 거스러미 뜯어서 그런 거예요."
"이거 주치의도 아세요?"
"아뇨? 얘기 안 드렸어요."
"제가 다 이를 거예요."
"네? 아니 이걸 왜.."
"주치의께도 말하셨어야죠!"
때마침 주치의가 치료시간 중 회진을 왔고 진짜 그대로 이야기하는 치료사.
아니.. 선생님.. 아니..
새벽 4시 30분. 불쾌한 소리에 눈을 뜬다. 아 옆자리 중국인 또 시작이네.
드르륵. 부스럭부스럭. 서랍을 여닫는 소리와 비닐봉지를 뒤적이는 소리.
타닥 탁 타닥 탁. 그리고 침대 프레임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
서랍과 비닐봉지는 5분 이내에 소리가 멎지만, 타닥 탁 타닥 탁 이 소리는 도통 멈출 생각을 않는다.
5시 30분이 넘어가는 무렵. 1시간 30분이 넘어감에도 당최 멈출 생각이 없는 소리.
타닥 탁 타닥 탁.
결국 이불을 싸들고 로비로 나가 눈을 붙이려 하지만, 이미 달아난 잠이 퍽이나 올 리 없다.
로비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약 1시간 동안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온 뒤 화를 낸다.
병실엔 라운딩 중이던 간호사도 있네. 때는 이땐가.
"저기요. 아저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어 이거 좀 꽂으려고 하는데."
"아니 그걸 왜 새벽에 하고 있냐고요. 그 시간 때문에 새벽 내내 잠을 못 자잖아요."
욱 하는 마음에 상당히 큰 데시벨이 울려 퍼진다. 상황을 지켜보던 간호사가 나에게 물어온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 이 사람이 새벽 4시 30분부터 지금까지 내내 탁탁 소리 내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잖아요."
"아. 그럼 혹시 병실 옮기시는 건 어때요?"
"제가요? 이 사람이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전 여기 입원했을 때부터 쭉 이 자리에 있었고, 이 사람이 다른 병실에 있다가 이쪽으로 옮겨온 건데 왜 제가 움직여야 되는 거예요?"
"아 그러시구나. 그렇죠."
대뜸 병실을 옮기라는 말에 놀란 건가? 다짜고짜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는 그 사람.
아이러니한 건 잘못했다는 말을 내게 하는 게 아닌, 자기 옆 자리에 있던 간병인 여사에게 한다.
"잘못했어요. 저 쫓아내지 마세요. 이제 안 그럴게요."
가지가지하는 양반이네. 이제부터 안 그러겠다고? 신뢰는 쥐뿔도 없는 양반이 퍽이나 그러겠다.
아침부터 욱한 덕에 혈압은 천장을 뚫기 일보직전이고, 덩달아 편두통이 따라온다. 진통제를 두 알 먹고 재활스케줄을 소화하러 간다.
수동자전거를 타는 데엔 피로가 쌓인 탓일까. 거의 돌리는 시늉만 하며 시간을 보낸다.
다음 날 새벽 5시 30분. 역시는 역시였다.
늘 그렇듯 드르륵, 바스락 소리가 하모니를 이룬다. 어제의 그 말을 찰나의 순간이라도 안 믿길 정말 잘한 것 같더라.
아침을 먹은 뒤, 오며 가며 옆자리의 중국인을 노려보고 있자니 자신을 노려보지 말라는 중국인.
"너 눈 그렇게 뜨지 마."
"당신만 보면 화가 솟구치는데 눈을 어떻게 이렇게 안 떠요?"
"그래도 그렇게 눈 뜨지 마."
"당신이 새벽에 내는 그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니까요?"
"그럼 소리가 나는 걸 어떡해."
"아니 그걸 꼭 새벽 시간에 하는 이유는 뭔데요?"
"그걸 그때 하지 언제 해."
"지금 하면 되잖아요. 지금."
어처구니가 없네. 뭐? 소리가 나는 걸 어떡해? 그때 아니면 언제 하냐고?
아 이 꽉 깨물고 진짜 뒤통수 한 대만 쎄게 후려치고 싶단 생각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른다.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는 기분이 든 게 대체 몇 년 만인지.
마음속에 든 울분이 폭발하며 서러움과 분노로 가득 찬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아침에 잠깐 인사하러 온 옆 병실의 형님 한 분이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더니 놀라곤 애써 달래주신다.
"밍아 무슨 일이야. 괜찮아? 우선 형이랑 같이 옥상 올라가서 바람이나 좀 쐬자."
옥상에서 한바탕 쏟아낸 후 병실로 돌아오며 진통제를 먹음과 동시에 SCI FIT 시간을 취소한다.
컨디션 난조로 인해 당최 돌릴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
치료사들은 오늘 유독 초췌해 보인다며, 컨디션은 괜찮냐며 물어온다.
매 치료시간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한다.
하루가 지나 회진 때 현 조치상황에 대해 묻는 주치의.
"밍님 조치는 됐나요?"
"수간호사 선생님이 주의는 줬고, 계속 병실 내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아.. 제가 말해두긴 했는데 한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주치의는 주치의대로 의견을 전달하겠다고 하니 좀만 더 버텨보자.
1월 말, 옆 병실에서 퇴원하는 환자가 있으니 그쪽으로 이 사람을 옮겨줄 순 있냐는 의견까지 대놓고 제시하였으니 뭔가 피드백이 오긴 오겠지.
"밍님 이거 선물이에요."
"엥? 수면양말? 이렇게 갑자기 선물을요? 선생님 퇴사하시는 거 아니죠? 안 돼요. 가지 마세요. 못 가요."
"헤헤 아니에요. 설 연휴 맞이 제 담당 환자들에게 드리는 선물이랍니다."
"헉 감동이에요. 제가 드릴 건.. (주섬주섬) 없는데.."
"에이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드리는 건데요~"
어르신들 취향에 맞춰 준비한 거라던 치료사 선생님.
지금도 서랍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 아까워서 신을 수가 있어야지.
설 연휴를 맞이하여 나 스스로 단 걸 쿠팡 한다. 다름 아닌 크리스피 도넛.
반년만에 먹어보는 그 달짝지근함에 황홀경을 느낀다. 음~ 그래 이 맛이야.
때마침 출근하신 간호사 선생님들께도 하나씩 드린다.
"선생님. 연휴에 고생하시는데 하나씩 드셔요."
"와! 밍님 이거 맛있는 거잖아요!"
"네. 좀 달다구리 해서 커피랑 드시면 더 좋을 거예요."
"와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밍님!"
크리스피 도넛과 커피, 그리고 위쳐3.
세 가지를 고루 즐기며 병원에서의 설 연휴가 흘러간다.
참 시끌시끌했던 한 주가 흘러간다.
직접적으로 맞부딪히는 걸 좋아하지 않아 어지간하면 참고 넘어가려 했으나, 이번 건만은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새벽마다 울리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비단 이번 주만의 일이 아니었다. 지난 2~3개월 동안, 그 중국인이 다른 병실에서 이 병실로 넘어온 그 순간부터 계속된 소음이었다. 그간 그려려니 넘어가려 했으나 이번 건이 도화점이 되며 결국 그동안 억눌러왔던 것이 터져버린 셈.
화라는 감정을 직면한 지도 굉장히 오래되었는데, 그것을 이번에 다시 마주하게 됐다. 거의 수년만에 느끼는 감정에 스스로도 놀랐고, 덩달아 눈물로까지 표출되더라.
역시 유쾌한 감정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