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장염과 고마움 사이, 그 어딘가에서 #24

길랭바레증후군, 스물네 번째 이야기

by 밍밍한 밍

○ 2023년 1월 첫째 주


한창 잘 자고 있던 1월 2일 새벽. 갑자기 윗배가 콕콕 찌르는 불쾌한 느낌이 느껴진다.

꿈 치곤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하단 말이지. 꿈이면 그냥 그것으로 끝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이건 장염이 확실하단 직감이 스친다.

그리고 불길한 직감은 빗나가지 않는 법.

아침부터 무언가를 먹는 족족 화장실로 휠체어를 열심히 끌고 가기 바쁜 하루가 시작된다.


'그래도 치료는 조심조심히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어림도 없다며 신호를 보내는 장.


'안 되겠다. 인간의 존엄성은 지켜야지.'


장염의 원인을 찾기 위해 지난날 먹은 것을 떠올려본다.

하루 지난 치킨, 참크래커, 오예스, 열흘 방치된 귤 등..

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치킨은 아침에 먹었으니 문제가 생겼으려면 진즉 어제 점심부턴 신호가 왔어야 했다. 주전부리 역시 마찬가지. 저녁에 먹은 귤로부터 시작된 스노볼이 링거로 매듭지은 것으로 자체 결론을 내린다. 땅땅


자체 결론 이후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지금 길랭바레증후군도 장염으로부터 시작됐는데, 이거 또 악화되는 거 아냐?'


가능성은 열려있는 법. 주치의 역시 약간의 우려를 표하긴 했으나.. 그건 열흘 이후의 일이니 그때 가서 생각해 보기로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당장 걱정해 봐야 조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링거 좋아.


종일 재활 스케줄을 취소하고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다 신호가 온다 싶으면 주저 없이 화장실을 간다.

점심 즈음부턴 오른팔에 링거가 추가된다.

밥은 기존 쌀밥에서 죽으로 대체되고, 김치 역시 동치미로 대체된다.

뭐야 동치미가 더 맛있잖아? 계속 동치미로 바꿔달라 그럴까?


중간중간 담당 치료사들이 얼굴을 내비치고 간다.


"밍님 대체 뭘 잘못 먹었길래 장염에 걸린 거예요?"

"허허 그러게요. 아마 귤 아닐까요."

"아이고 드실 때 조심 좀 하시지. 몸조리 잘하시고 내일 봬요."

"네 감사합니다."


훈훈하군.




장염은 하루 만에 다 나았고 3일부턴 기존과 동일하게 재활스케줄을 소화하기 시작한다.

OTL 자세를 만들어 다리를 뒤로 쭉 차 본다.

왼발은 신경 전달도 제대로 안될뿐더러 힘도 없어 들어 올리지 못하고 파들파들 떨리기만 하는 반면, 오른발은 얼추 뒷차기 하는 시늉이 나온다.

왼발은 치료사의 보조하에 뒷차기 하는 모양새를 하고, 오른발은 모래주머니 2kg를 찬 상태로 뒷차기를 한다.


베드에 납작 엎드린 채 다리를 뒤로 접어본다. 오 접어지네. 물론 완벽하겐 안되고, 허리를 끌어다 쓰는 느낌이 강하다.

불과 한두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절반도 채 올라오지 못한 다리였는데..

오른쪽은 상대적으로 좀 더 수월하게 올라가지네.

냅다 1kg 모래주머니를 채워보자는 치료사. 그..그래야지.. 조..좋지... 오..오히려 조..좋아...

그렇게 운동을 마치고 나면 뒷벅지가 땡기는 느낌이 쫙 느껴진다.


재활병원으로 옮겨온 직후에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동작들이었는데, 지금은 그 시늉이라도 할 수 있다니.

회복 속도가 많이 더뎌서 그렇지, 차도가 있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애증의 밸런스 쿠션. 난 네가 싫어.


밸런스 쿠션 위에 올라 앞뒤로 몸을 기울이며 균형을 잡아보는데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뒤쪽으론 어찌어찌 몸이 넘어가는데, 앞쪽으론 도저히 넘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발목과 앞꿈치로 전달되는 힘이 너무 약해, 발은 발대로 몸은 몸대로 앞으로 넘어가지 않는 상황이 나온다.

거기에 오른쪽 허벅지에서 잡아주는 힘이 부족하다 보니 몸의 균형을 옮길라치면 오른쪽 다리가 살짝 구부려진다.

총체적 난국.


"밍님 앞쪽으로 힘 더 주셔야죠. 앞꿈치에 힘 더 주세요."

"헝."

"오른쪽 다리 펴세요."

"헝."


정말 재밌다 ^^




하루는 휴가 간 치료사를 대신하여 다른 치료사분이 커버하러 와주셨다.

치료사에게 대뜸 질문을 한다.


"선생님 혹시 게임 좋아하세요?"

"네. 게임 좋아하죠."

"오 혹시 어떤 게임하시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순간 머뭇거리는 치료사의 기색이 느껴진다. 뭐지. 무슨 게임을 하길래 섣불리 대답을 못하는 거지?


"아 저 엘든링이라는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와 그거 갓겜이라고 자자한 거 아녜요? 선생님 근본 있는 게이머시네요."

"밍님도 아시나요? 어떻게 아시죠?"

"저 그거 난이도 있는 게임이라고 해서 살까 말까 고민 중이거든요."

"소울류가 어렵긴 하죠. 그럼 밍님은 어떤 게임하세요?"

"저 지금은 위쳐3 하고, 이전엔 몬스터헌터 월드랑 아이스본 했었어요."

"아 그러세요? 몬스터헌터 그래도 할 정도시면 엘든링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추천드립니다."

"오 그래요? 감사합니다."


패키지 게임을 하는 사람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반가움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 이야기가 나온다.


"저 와우도 했었거든요."

"진짜요? 와우가 RPG의 기반을 많이 닦아둔 게임이긴 하죠. 그럼 진영은 혹시.."

"저 호드예요."


짝짝짝. 이 치료사는 훌륭한 사람이다. 와우는 호드지. 자고로 비열한 얼라는 하는 게 아니다.

유사 게이머(?)가 아닌 진성 게이머를 만났다는 반가움이 매우 큰 시간이었다.

겜잘알인 훌륭한 치료사 짝짝짝.




친구들과 이젠 전 직장이 된 곳의 팀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새해 겸 잠깐 온다는 친구와 쿠키를 보내준다는 친구 그리고 책 선물을 보내주신 팀장님.


"너 이런 거 먹어도 되지?"

"당연하지. 민트초코 맛은 아니지?"

"아 그걸 생각 못했네."

"???"


오랜만에 먹어보는 베라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을 품은 포켓몬스터와 콜라보한 쇼핑팩이 진짜 귀엽더라.


"너 쿠키 먹어도 돼?"

"어 먹는 건 상관없어. 이미 치킨이며 회며 과자며 다 먹고 있어."

"오 다행이다. 그럼 쿠키 한번 먹어볼래?"

"잉? 쿠키?"

"응 맛 괜찮은 거 같더라고. 너도 한번 먹어봐바."

"오 고마워 친구."


비주얼에서부터 육중함을 자랑하는 쿠키. 그 내실도 가득가득 차있던 밀도 높은 쿠키들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팀장님께서 보내주신 책을 택배로 수령한다.

책을 보내주시며 한 마디 덧붙인 팀장님.


"선임님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실 거예요."


4000주 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재테크일까? 자기계발서일까?

팀장님의 한 마디로 봐선 자기계발서인데. 조만간 읽어봐야겠단 생각을 하며 병원 사물함에 고이 꽂아둔다.


귀여운 쇼핑백, 밀도 높은 쿠키, 그리고 4000주


장기간 병원에 있음에도 주기적으로 챙김을 받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만 비치지는 않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며,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2023년의 시작.

주변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훈훈함으로 가득한 2023년의 첫 단추를 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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