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랭바레증후군, 쉰 번째 이야기
23년 7월 첫 월요일.
오전 일찍부터 근전도검사를 받기 위해 아주대학교병원 검사실로 향한다. 병원으로 가던 중, 차 안의 라디오에선 클래식기타리스트 프란시스코 타레가 - 아라비아 기상곡(Francisco Tarrega - Capricho Arabe)이 흘러나온다. 동아리 활동 당시 주구장창 들었던 곡이었고, 한 번은 꼭 완곡 아니 연주하고 싶은 곡이었으나 난이도에 과감히 포기한 곡. 아는 곡을 오랜만에 들으니 내심 반가운 느낌이 샘솟는다.
반가운 곡을 들으며 반갑지 않은 검사를 받으러 검사실에 도착, 조금 대기하다 호명되는 이름을 듣고 검사실로 쪼르르 들어간다.
이번 검사는 하지 원위부(종아리-발)에 한해서 진행됐다.
"아프면 말씀하세요."
담당자 안내와 함께 붙인 패드를 따라 흘러 들어오는 전기자극. 아프다고 얘기해 봐야 검사만 잠시 정지될 뿐, 어쨌든 이 날 해야 할 건 다 해야 하기 때문에 입술과 어금니를 꽉 깨물어가며 따끔거리는 자극을 애써 참아낸다.
양발에 느껴지는 자극의 세기 역시 다르다. 같은 세기의 전기자극이 들어올 텐데, 왼발에 비해 오른발에 훨씬 더 선명하고 뚜렷한 아픔이 느껴진다. 오른발 검사를 먼저 진행했기에 왼발의 아픔엔 눈 꿈쩍 않고 버틸 수 있었지, 만약 왼쪽부터 했다면? 아마 까부러 쳤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검사는 다음 주에 나올 예정입니다."
짧고 굵은 근전도검사를 마치고 병원으로 복귀, 오후 재활스케줄을 소화한다.
다른 층에서 근무하고 있는 치료사가 문제 하나를 가져왔다고 풀어보라며 문제를 보여준다. 주어진 문제의 지문은 다음과 같다.
<지문> : 멕시코만의 뜨거운 해류는 노르웨이 만을 거치며 온도가 내려가 극지방에 합류하며 수심 밑으로 내려간다. 그럼 같은 러시아 위 영하 20도의 바닷물에 비해 같은 위도 선상의 노르웨이 해수의 온도는 상대적으로 ( )
<문제 보기> : ① 더 높다, ② 낮다, ③ 같다
"선생님 정답 이거 아니에요?"
"확실해요?"
"네. 확실하죠."
"왜 그런 거예요?"
그리고 이유를 쭉 설명해 준다.
"근데 이거 답 없어요?"
"확인 못했어요. 다음에 문제 풀 때 설명해줘야 했는데, 고마워요."
"?????"
다음날, 문제를 보여준 치료사가 내가 제시한 답안이 맞았다고 말해주었다.
뭐지?
발을 높이 들어 올릴 때, 발목에 채우는 모래주머니의 중량이 1kg 더 늘어났다. 총 양 발 3kg에 해당하는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채우고, 양팔을 치료사의 어깨에 걸친 채 앞으로 나아간다. 와 고작 1kg 늘어난 건데 체감은 3~4kg는 거 같다. 한 발 한 발 들어 올릴 때마다 발목에서 이전과는 남다른 묵직함이 느껴진다.
"어때요? 할 만하죠?"
"네? 할 만하다뇨. 전혀요."
"에이 잘만 걷잖아요."
"하 이거 진짜 무거워요."
치료실을 반 바퀴 걷고, 조금 쉬다가 반 바퀴를 마저 걷는다. 발목에서 감당해야 하는 중량이 늘어난 덕분에 얼마 못 가 골반이 춤추기 시작한다.
이후 바퀴 달린, 치료사들이 쓰는 의자에 앉아 내 골반을 잡는 치료사.
"자 한번 앞으로 가보세요."
"네?"
"자 출발!"
골반을 잡은 치료사의 저항을 이겨내며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조금씩 몸이 삐그덕거리는 게 느껴진다. 조금 발을 내디딜라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발.
"선생님, 앞으로 안 가져요."
"아녜요. 밍님은 갈 수 있어요. 자 출발!"
조금씩 저항을 조절하는 치료사와 치료사를 끌고 가는 나.
아... 크리스마스의 루돌프가 이런 기분이겠구나.
데드리프트의 중량을 올릴 방법이 어디 없나 고민하던 중, 물통을 들고 해 보겠냐는 치료사.
"6층에 물통 있는데, 한번 해보시겠어요?"
"그 정수기 큰 물통 말씀하시는 거죠? 20kg 정도 되는 거."
"네 맞아요."
"오 좋아요. 한번 해보고 싶어요."
7층에서 6층으로 자리를 옮겨 물통을 들고 데드리프트를 시도해 본다.
"밍님 절대 복압 푸시면 안 돼요. 저얼대. 무리하는 것 같다 싶으시면 바로 주저앉으세요."
"넵."
물통을 몸에 끌어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18.9kg에 해당하는 물체를 들고 동작을 수행해 보는 건 오랜만에다 아직 하지 근력이 온전치 않기에 행여나 삐끗하진 않을까 긴장되는 순간. 복압을 절대 놓지 않고 동작을 3~4회 수행 후 치료 베드에 앉는다.
"밍님 어떠세요? 할만하세요?"
"아, 이게 처음 한두 번은 괜찮은데, 3~4번 반복하니까 허리에 과부하가 오는 것 같아요."
"흠. 그럼 데드리프트 말고 스쿼트를 해볼까요?"
"네, 스쿼트를 한번 해볼게요."
스쿼트가 데드리프트보다 좀 더 나은 거 같으면서도, 여전히 허리에 부담이 오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보다. 거기에 가동범위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건 덤. 버틸 수 있는 근육이 약하다 보니 깔짝거리는 시늉만 하게 된다.
자세를 좀 더 변형하여 이번엔 옆으로 한 발자국씩 움직여 본다. 오 이건 할만한 거 같은데?
"밍님 이건 어떠세요?"
"오 괜찮아요."
"어디에 자극이 오는 거 같으세요?"
"엉덩이에 자극이 많이 오는 거 같아요. 허리엔 부담이 안 오네요."
"아 좋습니다."
아 자세 찾기 힘들다.
아침 첫 치료시간마다 병동을 천천히 뛰어다니는 중. 갈수록 난이도가 조금씩 올라가는 기분이 든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기도 하고, 4kg 빈 봉을 짊어진 채 뛰기도 하더니, 이젠 두 가지 모두를 행한 채 뛰어보자는 치료사.
"모래주머니도 차고, 빈 봉 들고, 2바퀴 뛰어보는 거예요."
"네? 2바퀴요? 제가 잘못들은 거 아니죠?"
"아유 그럼요~ 밍님이 잘 들으신 거 맞아요."
첫 바퀴는 어찌어찌 어거지로 뛰었으나, 두 바퀴째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빨리 걷는 것으로 대체했다. 말이 뛰고, 빨리 걷는 것이지, 실상은 치료사가 뒤에서 밀어주어야 겨우 속도가 날까 말까.
"치료사라는 직업 특성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감이 오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아 그쵸. 그럴 수 있을 거 같아요. 어? 그럼 저는 어떤 사람인 거 같아요?"
"음.. 밍님은.. 본인만의 주관이 뚜렷하고, 호불호가 확실하면서 그걸 표현하는 사람?"
"흠 그렇군요. 뭔가 사회생활 하면서, 또 사람 만나면서 이거 저거 좀 바뀐 거 같아요. 이전엔 그냥 꽁하니 있었다면, 이젠 그걸 표현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된? 병원에 거의 1년 가까이 있으면서 특히 더요."
"맞아요. 그런 표현하는 게 참 어려운데, 할 땐 할 줄도 알아야 하니까요."
고정 커버를 들어오시게 된 선생님과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던 중 사람 성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호.. 나는 저렇게 비치는 중이었구나.
주말엔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왔다. 작년부터 벼르고 벼른 메소포타미아 전시를 관람하기 위한 발걸음.
약 1시간 남짓 지하철을 타고(자리 양보는 택도 없죠) 또 꾸역꾸역 걸어가며 도착한 전시장.
로비에 도착하니 당일 오후 3시부터 예정되어 있던 음악행사의 리허설로 리베르탱고가 연주되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리허설을 잠시 감상하는 데 들려오는 옆 가족의 이야기.
"○○아, 이거 무슨 악기 소리인지 알아?"
"무슨 악기야?"
"해금이란 거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대사인데.. 데자뷰인가?
전시 관람을 하던 중, 뒤꿈치가 스멀스멀 아파오길래 조금씩 쉬어가며, 또 걷는 속도를 확연히 줄여가며 1인 전시관람을 무사히 마쳤다.
자그마한(?) 전시 한 동에서만 이루어진 전시였음에도 오밀조밀 알차게 전시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주기적으로 도슨트도 이루어지고 있어, 전시를 더 재밌게 관람할 수 있는 지도?
흥미로웠던 점을 하나 꼽자면, 당시에도 채무 변제와 재판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문자가 단순히 경제활동을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닌, 그 외의 용도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아쉬운 점을 하나 꼽자면, 최초의 신화 '길가메시 서사시'의 부재였던 점. 수메르 문명에서 탄생한 인류 최초의 신화로 기록되는 '길가메시 서사시'에 대한 유물이나 언급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