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이란 단어를 쓰려니 뭔가 좀 억울한 마음이지만, 아니 아직 이 단어를 쓰기엔 많이 이른 나이인데
싶기도 하지만 그 말밖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으니. 라떼는 펜팔이라는 게 대유행을 했었다. 편지를 보내는 경로도 다양했다. 패션잡지 마지막 란에 펜팔 친구 찾기 페이지가 있기도 했고 이제는 사라지고 없어진 나나, 밍크 같은 만화책 뒷면에도 펜팔 친구란이 있었다. 연령층도 다양해서 골라보는(?) 재미도 있었고 진짜 보내면 답장이 올까? 호기심을 채워주는 신선한 자극제가 됐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다. 참새떼처럼 떠들던 우리들은 캐스터네츠처럼 입술을 앙 다물고 말한 적이 없는 척 시치미를 뗐다. 바로 교과서를 펼칠 줄 알았던 선생님은 책에 끼워둔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 우리 앞에 흔들어 보였다. 초등학생들은 호기심 덩어리 들이기 때문에 선생님의 그 행동은 시선을 끌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다른 지역의 남자아이가 우리 학교 우리 반으로 자신의 번호와 같은 사람에게 보낸 편지라고 선생님은 운을 뗐다.
생판 모르는 남자애가 보내온 편지는 나에게 도착한 편지였다. 아이들에게 읽히고 나중엔 손때가 까맣게 타 마지막 종착지였던 나에게 올 때 즈음엔 간직한 지 몇 년쯤 된 오래된 편지처럼 허름해져 있었다. 굳이 손에 넣어 설렘을 가져볼 생각은 없었다. 나는 편지를 좋아했고 적기도 좋아했지만 모두에게 해당되는 공적인 편지는 반갑지 않았다. 또박또박한 글씨로 수신인란엔 내 이름 세 글자가 분명히 적혀있는 편지가 좋았다. 누가 봐도 편지의 주인공은 내가 되는 지극히 사적인 편지를 나는 참 좋아했다. 그 편지를 가만히 읽었던 기억이 있다. 답장을 했던가 하지 않았던가.
요즘 같은 세상엔 상상도 못 할 일이 될 거다. 심혈을 기울여서 편지지를 고르고 무슨 말을 하면 실례가 되지 않을까. 상대방에게 어떤 글로 말을 건네야 호감을 살 수 있을까. 그전에 어떤 콘셉트로 말을 이을까. 우표는 빠른 게 좋겠지. 이 편지가 얼마 만에 도착해줄까 하면서 지극히 아날로그적 감성을 터뜨린다는 것. 이게 바로 낭만이란 것이다.
빠르지 않은 거면 시대에 뒤쳐지는 것, 생각의 시간은 짧을수록 좋고 한 시가 바쁘니 상대방의 답장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받아내야 만족스럽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얼리어답터는 인싸가 되는 것이고 턴테이블에 LP판을 올려 음악을 감상하면 아싸가 되는 것이냐고. 이런 점에서 나는 한 번도 예외가 없이 한결같이 아싸로 살았다. 선택적 아싸는 시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언제나 아날로그 감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시절이 그리운 건 순수함이 잔뜩 묻어나 뚝뚝 떨어지던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친구 한 명을 사귀어도 그 끈이 편지가 된다면 그 친구의 정보 몇 가지를 알게 되기까지 적어도 일주일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답장을 늦게 쓰는 게으름쟁이라면 더 많은 기다림을 감당해야겠지.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수많은 설렘으로 치장하며 마음을 어슬렁대던 감성이 나는 요즘 너무나 그립다.
어린날에 친구들에게 받았던 편지들을 가끔씩 꺼내보는 이유는 그날의 냄새와 공간을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