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지선
미리 말하지만, 여름에 있었던 만남을 빙자해서 이렇게 계속 편지를 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을 불구덩이에서 구해 냈으니 이런 편지쯤은 수시로 보내도 괜찮다고 여기며 쓰는 편지는 더욱이 아닙니다. 내가 보낸 편지를 당신은 읽지도 않으십니다. 봉투를 열어 보려는 마음조차 품지 않으십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또 편지를 씁니다. 언젠가는 읽어줄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 그 언젠가가 결코 오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양귀자 , 천년의 사랑 中>
입 밖으로 하는 말은 기껏해야 몇 마디, 종이 위에 나열하는 글의 숫자는 몇 천자, 몇 만 글이 됐다. 입술보다 손이 앞선 이유는 이미 오래전 정리해둔 말들의 순서가 더 익숙해진 이유 때문일 거다. 출발을 앞둔 기차들처럼 막힘이 없이 써 내려갔던 글 속엔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말들이 있었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말, 듣기 힘든 말도 아니었지만 얼굴을 보며 건네기엔 세상에서 가장 하기 버겁던 말, '고마웠어. 잘 지내' 행복을 빌어주는 따뜻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진정한 의미는 다정함으로 포장해 놓은 비겁한 회피였다. 모든 이별엔 사정이 있다. 나의 사정과 그의 사정이 맞물려 그 의미가 까맣게 타버린 게 문제였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라는 아주 기막힌 이유로 동점이 된 듯 돌아섰지만 세월에 등 떠밀려 살다가 돌아보니 그건 그저 핑계였다고 깨닫는다. 그동안 고마웠어, 잘 지내. 이 말을 마지막으로 그에게 딱 한 번 소리 내어 꺼내봤던 날. 그는 슬픈 표정으로 정말 이 모든 게 이렇게 끝이 나는 건가. 믿기 싫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 현실에 무너져 내렸다.
사랑도 나이를 먹어 늙으면 철이라는 게 드는 걸까. 모든 말로 뭉뚱그려 해명하던 이별이었는데 시간 앞에 무뎌져 담담해진 탓인지, 모든 게 내 부족함이었지 한다. 그 시절에 나는, 반드시 당신이길 바랐고 당신이어야만 했다. 요즘 추억하는 당신에게 나는 서슴없이 체념을 하는데 그날에 존재했던 당신에게도 체념을 할 줄 알았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싶은 것이다. 그에겐 불에 덴 화상 자국처럼 아픈 기억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나와의 사랑이, 나에겐 너무나 아름답던 청춘드라마처럼 남아서 가끔은 이렇게 혼자 미안해지는 밤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