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연
"모르긴 해도, 슬플 때는 시간을 정해놓고 실컷 슬퍼하는 게 어때요? 무엇 때문에 그처럼 슬퍼했는지, 그런 자신이 이해가 안 돼서 어리둥절해질 때까지 말이에요."
"어떻게요?"
"그러니까 물병 속의 물처럼 계속 마셔서 없애는 거예요."
"슬픔을요?"
"그래요."
<은희경 , 그것은 꿈이었을까 中>
가끔은 아주 먼 기억처럼 느껴졌다. 분명한 기억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이상하리만치 꿈같았던 것이다. 만약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아마 도저히 꺼내볼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라 무의식이 알아서 숨기는 것이란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런 어마 무시한 것이 아닌데도 난 왜 곧 잘 슬퍼졌는지 모르겠다. 기억할 수만 있다면 빠짐없이 기억하고 싶은 조각이었다. 울며 겨자 먹듯이 나에게도 가슴 깊이 새겨진 첫사랑 정도는 있다고 스스로 자위했다. 올라오는 모든 감정들을 억지로 삼킨 적도 있지만 그래서인지 그리움이 역류하여 폭주하는 듯했다. 그러다 하게 된 생각이란, 죄를 지은 기억도 아닌데 나는 왜.
내 마음에 자리하는 시절이 있다. 그 시절은 구간으로 쌓여서 페이지로 구분된다. 두꺼운 단락으로 만들어져 마치 책과 같다. 그는 한 페이지에 쓰인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다. 굳이 비켜가 삼킬 필요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인 것이다. 불쑥불쑥 슬퍼져 못마땅하긴 하지만.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 오랫동안 머물러도 늘 설레는 이야기가 있다는 건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