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안에서는 모두 똑같다

by 새벽뜰
작가. 정수진
기억 안에서는 모두 똑같다. 실제로 경험한 일이건 상상한 것이건, 꿈이건 그것이 기억의 공간에 자리 잡으면 그저 기억으로 동등한 존재성을 갖게 된다. 만화책에서 본 것, 꿈꾼 것, 실재 기억, 모두 기억이라는 장소를 통과하게 되고 회상이라는 과정을 통해 재생되면 모두 같다.

- 그림이 담고 있는 정보의 설명, 정수진




이사를 하면서 책장 정리를 했었다. 회색 먼지가 측면에 눈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몇 번씩 읽었고 너무 아꼈던 책들인데 다른 것들에 밀려 우선순위에서 벗어나게 된 거다. 책 정리는 노동이었고 힘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태어나 그렇게 많은 노끈을 사용해 본 적이 처음이었다. 숨바꼭질하다 이제야 겨우 땡-을 듣게 된 사물들처럼 사이사이로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동전, 책갈피, 당시엔 찾아도 나오지 않던 , 더 이상은 유효하지도 않은 카드, 소소한 분실물들이 수북했다. 그렇게 수북한 틈에서, 그에게 전하지 못한 편지를 발견했다.


내가 그에게 세상에 딱 한 권밖에 없는 포토에세이집을 만들어 주었다. 갈색 스웨이드 가죽에 끈으로 잠글 수 있던 체크기의 앨범이었다. 그걸 준비하는 동안 난 원고 마감에 쫓겨 허덕이는 작가처럼 부단히 도 열심이었다. 일주일이 걸리든 한 달이 걸리든 상대방은 전혀 알지 못한 사실이었는데도. 나 혼자 빨리 주고 싶어 안달이나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바빴다. 힘든 줄도 몰랐고 매일이 설렜다. 선물을 주는 당일보다 그걸 준비하면서 손꼽아 기다린 날들이 나에게 더 충만한 기쁨을 주었다. 소풍을 가는 날보다 소풍 가기 며칠 전이 더 설레는 것과 비슷했다. 앨범을 주던 날, 그는 너무 감동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영원히 간직할 거라며 몇 번이고 앨범을 뒤적이고 바라보았다.



기억은 무섭다.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인데도 보자마자 아, 저것의 정체는 무엇이구나 잊힘이 무색하게 쉽게 파악이 가능해지도록 수를 쓰지 않나. 괜한 아련함에 지기 싫어서 눈길을 돌렸지만 그도 알다시피 매번 감정에게 지는 사람이 나니까. 썼다 지웠다 수없이 반복해 겨우 완성한 편지였다. 딴에는 부끄럽지 않다며 덤덤하게 썼던 것 같은데 유치한 건 당연하고 되지도 않게 어른인 척 휘갈겨 내려간 내용이 재밌어 개그 코너를 본 사람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그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쓴 편지였다. 나는 말보다 글이 더 편하다 생각한 사람이었고 리듬도 표정도 없는 것이 또 글이라는 것이라 퇴고를 반복하는 작가처럼 심혈을 기울여 쓰긴 했었다. 고작 편지 하나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난 그에게 내가 할 말들을 모두 적어 보여주려는 듯 애를 썼다. 전날까지만 해도 고백하는 소녀처럼 두근댔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용기는 어디 가고 없었다. 그렇게 따뜻한 그를 두고 전하지 못했다. 내 선물을 그는 아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헤어졌던 시간 동안에도 한 번씩 뒤적여 봤다며 그의 방 책꽂이에 잘 넣어뒀었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는 나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정말 영원히 간직해 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고작 종이 몇 장도 깊은 추억으로 남으면 무거워 버리지도 못하게 되는데 그는 기억으로도 모자라 수십 장의 추억과 글과 사진까지. 눈앞에 존재하는 추억들까지 감당했어야 하니 많이 힘들었겠지. 앨범 속엔 그를 향한 나의 응원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가끔은 마음을 표현한 낯간지러운 말들이 깊은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진짜 하고 싶던 이야기들은 한 번도, 하나도 적어 놓지 않았다. 기쁨이 기쁨으로 끝나는 때도 있어야 했다. 모든 게 완벽해 맑고 화창한 날 ,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옷을 젖게 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별을 하게 될 거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심술부리듯 해서 이야기를 슬프게 마무리 지을 필요는 없었다. 나의 사랑이 그가 하는 것보다 깊지 않다고 자백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먼 훗날 되새겨질 슬픈 감정을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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