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연
철 지난 드라마를 보다가 눈치도 없이 옛 기억에 발목이 잡혔다. 마음까지 도난당해서 기분이 엉거주춤해진 밤이었다. 이미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인데 다만 추억이라는 맹랑한 것 하나만 남아서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옛 시간과 조우하고 보니, 너무 많이 사랑했던 나를 마주하게 됐다. 이젠 볼 수 없고 마주할 수 없는 시간 속에 머물러서 , 이미 지난 이야기가 되어버렸는데 말이다. 내가 행복하든 아니든 사실과는 무관하게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불쑥 나타나곤 한다. 이게 추억이다. 그리움 앞에선 많은 것들이 무기력해진다.
이별 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미련한 짓을 나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해버리고 말았다. 상대방 프로필에 변화가 있으면 그 이유로 핑계를 삼고, 살았나 죽었나 아무도 모르게 평온하여 변화가 없으면 또 그걸로 핑계를 삼아 잘 지내는 건가 하며 상대방 걱정을 한다. 퍽 괜찮은 옛 애인 행세를 하고는 하는 거다.
"자?"
또는
"잘 지내?"
숫자 1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쥐구멍이 있다면 파고 들어가 숨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랬으면서 상대에게 답장이 올까 안 올까 전전긍긍하는 모습 속엔 어린아이 하나가 있었다. 그에게 긍정의 답신이 왔을 때 그런 적 없단 듯이 담담하고 쿨하게 생각이 나 안부를 묻고 싶었다고, 혼자 드라마를 써대고 앉았었다.
그날, 아주 오랜 후에 마주했던 날
마주하고 보니, 난 너무 웃기만 했다. 이젠 볼 수 없고 봐야 할 이유도 없으며 그저 기억되기만을 바라는, 너무 사랑하던 날이었는데, 여전히 내겐, 다시없을 날이었는데.
나는 어쩌면 이 운명의 수레바퀴의 끝이 아주 궁금했던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