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연
"세상엔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 언어나 관념은 현실을 못 따라가지. 그래서 자기만의 감수성이 필요한 거야.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그냥 느끼는 거지."
<전경린,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 中>
맴도는 마음을 뱉어내면 초조함은 사라지고 평온이 찾아온다. 짝사랑을 끝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백이라고. 물론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 깊어진 인연에 기뻐하거나 애써 숨겨 놨더니 문득 터진 마음 때문에 이어온 인연마저도 잃게 된다거나. 하지만 어느 쪽이든 1% 더 기울어진 마음을 따르다 보면 후회는 최소화되는 듯했다. 모든 선택이 반드시 해피엔딩일 수는 없겠지만 엔딩과 해피엔딩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저울질하며 인연의 후회 무게를 따지려 드는 건 너무 기계적인 태도이지 않나. 나의 방황이 가장 길었던 시절에 그를 만났다. 굳이 알릴 필요도 없고 소식을 전할 필요도 없이 성큼성큼 멀어진 관계가 되었어도 추억이라는 우아한 단어 앞에 설탕처럼 녹아내려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어정쩡한 감정의 연속선상에 낡아서 너덜너덜한 책 같아진 이야지만 이런 추억이 있어 든든하다는 느낌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짙어졌다. 환상인가 싶을 만큼 아주 생생한 꿈을 꾼 적도 있다.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내가 마주한 현실과 꿈의 간격이 지나치게 커서 암담했던 적도 있고 다시는 돌아갈 수가 없는 추억이 됐다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픔 속으로 몰아갔던 적도 있다.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사랑을 했어도 이토록 아름답게 기억하는 건 오로지 나뿐인 걸까 싶어서 불안하기도 했고 꼭 가벼운 안부를 묻는 위아래층 직장 동료처럼 당신에게도 나와의 사랑은 아름다웠던 게 맞지? 하면서 확인해보고 싶었던 적도 있다.
내 사랑을 향한 나의 믿음이 그에게도 온전히 스며들어 여전히 아름답고 따뜻하기를 나는 가끔 바라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