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기로 해

by 새벽뜰
그림. 이연





20대 초반 약국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아주 작은 동네 약국이었지만 동네 약국에서 약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던 곳이었다. 병원이 밀집되어 있고 시장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단골도 많았어서 꼭 내가 다니던 약국에만 주기적으로 오는 고정 손님들이 있었다. 장기 환자들이 약을 지으러 오면 한 두 달이 기본이었다. 그렇게 되면 약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동이 나 버리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엔 근처 약국에서 약을 빌려왔다. 돈을 빌리면 돈으로 갚듯이 약을 빌려 오면 약으로 되갚아 주어야 했다. 그날이 그랬다. 약이 동이 나 동맹처럼 지내는 , 걸어서 5분 내외였던 약국에 약을 빌리러 갔다. 나이가 있어 보였지만 여전히 젊기는 한 여 약사님이 운영하는 약국이었다. 빌리려는 약을 상대가 준비해주는 동안 사방을 둘러봤다. 제조실 안으로 빼꼼히 보이는 테이블 위에 커다란 꽃다발이 다소곳하게 있었다. 일터의 한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땐 공기가 정화되는 것처럼 기분이 환기가 됐다.


"꽃이네요? 선물 받으셨어요?"

"아, 우리 아빠가....."


웃으며 대답한 약사의 말이 생소했다. 아빠에게, 그것도 아무 날도 아닌 날, 저렇게 커다란 꽃다발을 선물로 받는다고? 졸업식이나 공연이 끝난 후가 아닌 평범한 날에 꽃다발을 받는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 놀라웠다. 그녀에겐 이런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는 사실이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 세상엔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빠는 늘 바빴지만 그래도 나와의 약속은 잘 지키는 편이셨다. 나는 어려서부터도 책을 좋아했다. 그래서 아빠에게 부탁을 했었다. 주말에 아빠가 일을 마치고 오면 같이 서점에 가 읽고 싶은 책을 사달라고. 어린 나는 아빠와 함께 서점을 가 책을 산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낭만을 느꼈다. 가족들끼리 모여 여행을 가는 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단 둘만의 낭만이 아닌 연례행사처럼 이뤄지는 유흥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일부러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책을 사준다는 사실은 깊은 추억이 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토요일을 목이 빠져라 기다린 나의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렸고 약속을 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셨다. 결국 내가 사고 싶었던 '톰 소여의 모험'은 엄마와 함께 서점에 가 살 수 있었다. 책은 재밌었지만 어린 마음은 서운함으로 가득 찼다. 너무 어려서 그 울먹울먹 하던 감정이 뭔지 정의 내리지 못했었는데 좀 커서는 알았다. 내가 많이 섭섭했었구나 하는 사실을.


장황한 이야기, 아빠를 통해서 그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맞는 건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이야기가 흘러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빠와 닮은 사람을 만나면 어떨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나는 편이 더 나을까. 나도 모르게 그런 잣대를 들이밀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사랑했던 그는 완벽히 정 반대되는 남자였고 그래서 한없이 부드러웠고 따뜻했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바람이 불어 마구 잡이로 흔들릴 때의 나를 굳건히 잡아줄 능력은 부족했고 내가 믿고 의지 하기엔 너무 약한 꽃 같은 남자였다. 그를 사랑하는 동안 나 역시 아름다운 꽃이 된 것 같았다. 약하고 순수하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사람이 되었다.


헤어지기로 결심한 이유가 뭐였을까. 그렇게 사랑한다고 믿었던, 먼 미래까지도 상상해 보았던 그와 나 사이에 이별이 끼어들게 된 게. 붙잡고 싶지도 않았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고, 담담하게, 행복했으면 좋겠어, 딱 그 정도로만 의미 없는 인사를 남겼다. 왜 난 거기까지만 이었을까. 왜 딱 거기까지만이었을까? 내가 그에게 묻는다면 그는 내게 뭐라고 말했을까. 이제는 웃을 수 있는 질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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