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다시 조용히 사라진다
어김없이 비가 내리면
마음이 먼저 젖는다.
그리고 그 사람,
꼭 이럴 때 생각난다.
한때는 그 사람도,
내게 “비 오는 날엔 전화할게”
그런 말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별것도 아닌 약속인데
왜 그렇게 오래도록 남아 있는 걸까.
지금도 창밖을 보면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산 속, 좁은 공간에서 부딪치던 어깨.
젖은 머리를 털며 웃던 얼굴.
그런 장면들이
이 빗속 어딘가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은 지금 어디서
누구와 이 비를 맞고 있을까.
혹시, 나처럼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떠올리고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그런데 비 오는 날엔
그런 상상조차 따뜻하다.
지나간 사람,
흘러간 마음,
젖은 기억.
모두 다 어딘가에
조용히 살아 있다가
이런 날에 불쑥 고개를 든다.
“그때 참 좋았지.”
그 말만 남기고
기억은 다시 조용히 사라진다.
비는 내리고,
나는 잠시
그 사람을 또 한번
마음속에 앉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