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은 말 없이 앉아 있는 것도
"비가 오면,
세월도 좀 젖는 것 같아."
오전에 비가 살며시 시작하더니
이젠 제법 들이붓는다.
대문 앞까지 내려다보이는 마루에
느긋하게 앉았다.
비가 마당을 치고,
처마 끝에서 물이 똑똑 떨어진다.
문도 안 닫고, 창도 안 닫고
그냥 앉았다.
옛날 같았으면
할매가 뛰어나와서
“이거 다 젖는다 카이!” 했을 텐데,
지금은 뭐…
젖으면 젖는 대로 두는 거지.
마루에 앉아 있으면,
시간이 안 간다.
아니다,
시간은 가는데
나는 그 자리에 그냥 남아 있는 느낌.
어릴 적엔 이 마루가 참 컸다.
뛰어다니다가 발가락 부딪치면
엉엉 울면서도 또 올라오고,
젊을 땐 이 마루에 앉아
담배 피우며 아버지랑 말도 섞었지.
이젠
그 누구도 여기 함께 앉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비 오는 날은 말 없이 앉아 있는 것도
하나의 이야기다.
젖은 마루에 앉아 있자니,
세상도, 마음도
조금씩 내려앉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