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인간] 나는 조선의 ‘꽃을 든 남자’다!

12화 강희안

by 초로의 궁사

첫화부터 이 연재를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이제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조선의 선비들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성리학 경전만 외우고 명분에만 매달린 고리타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음식과 요리에 해박했고(7화 허균),
당장 산으로 들어가 자연인 생활을 해도 꿀리지 않을 생존법을 익혔으며(11화 서유구),
부동산과 농장 경영에도 능했다(8화 이항복).
돌 깎는 데 미쳐버린(?) 석치 정철조(10화) 같은 별종도 있었다.


이런 면모는 일부 실학자만의 특성이 아니었다.
그들이 숭상한 공자 자신이 그러했듯,
‘배우고(學)’ ‘익히는(習)’ 즐거움은 삶의 모든 영역으로 뻗어 나갔다. 그 태도를 한마디로 부르면 격물치지(格物致知)다.

쉰, 꽃을 보게 되다

나이 쉰, 지천명(知天命)에 접어드니 세상의 소음보다 베란다 화초의 작은 속삭임에 귀가 먼저 간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놓쳤던 계절의 변화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조선의 선비 중에도, 꽃나무를 매만지다 인생의 이치를 깨달은 이는 없었을까?
왜 없겠는가!

꽃과 도를 함께 키운 사람, 강희안

인재(仁齋) 강희안(1417~1464)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선비이자 예술가였다.
세종 대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고, 서달의 아들이자 권근의 외손자라는 화려한 가문을 지녔다.
시·서·화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이라 불렸으며, 훈민정음 창제와 실록 편찬 같은 국가의 굵직한 사업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그의 성품은 명성과 거리가 멀었다.
본래 겸손하고 고요한 성정의 그는, 화려한 관직보다 자연과 벗하는 삶을 지향했다.
그가 남긴 『양화소록』은 단순한 원예서가 아니다.
식물의 생태를 통해 인간의 도리를 사유한, 조선판 ‘식물 철학서’다.

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귀는 것’​

강희안은 꽃을 장식품으로 보지 않았다.
식물마다 타고난 성정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대하는 것이 원예의 본질이라 여겼다.

“꽃의 품격은 사람의 덕성과 같다.
소나무는 지조가 있고,
국화는 은일함이 있으며,
매화는 맑은 고결함이 있다.”​

그에게 원예는 취미가 아니라 수행이었다.
식물을 관찰하며 인간의 도리를 배우는, 격물치지의 과정이었다.


쉰이 넘어 돌아보니 사람 관계도 다르지 않다.
내 뜻대로 교정하려 들기보다, 그 사람의 고유한 결을 존중하는 것. 강희안은 이것을 ‘양화(養花)’, 곧 꽃을 기르는 마음이라 불렀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합리적 관리’​

『양화소록』이 빛나는 이유는 관념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토양의 질, 물 주는 주기, 햇빛의 양을 꼼꼼히 기록했다.

​번식법: 삽목과 압조 등 오늘날에도 쓰이는 기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월동 대책: 혹한을 나기 위한 화분 관리법까지 빠짐없이 적었다.

강희안은 말한다.
식물이 시드는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 기르는 이가 순리를 거슬렀기 때문이라고.
인생의 후반전에 필요한 태도도 이와 같다.
억지로 상황을 바꾸려 애쓰기보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가장 합리적인 돌봄을 실천하는 지혜.

고요함 속에서 가꾸는 내면의 뜰

말년의 강희안은 관직에서 물러나 꽃과 나무를 벗 삼아 살았다.
그의 그림 〈고사관수도〉에는 바위에 턱을 괴고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선비가 등장한다. 그 평온한 표정은 『양화소록』을 쓰던 그의 뒷모습과 겹쳐 보인다.

지천명의 나이는 인생의 화려한 꽃을 피우는 시기라기보다, 그 꽃이 지고 난 뒤 열매를 맺고 뿌리를 깊게 내리는 시간이다.

오늘 퇴근길, 베란다 화초 하나에 물을 주며 강희안의 마음을 빌려본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네 성품대로 단단하게 살아내면 된다는, 식물이 건네는 위로.

500년 전 원예학자가 남긴 이 조용한 지혜가
당신의 쉰 살 정원에도 따뜻한 햇살이 되기를.​

#양화소록
#고사관수도
#강희안

#격물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