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블로흐와 전혀 상관 없는 글
역사를 조금 읽었다는 이들은 곧잘 역사는 결국 승자의 기록일 뿐이라며 냉소 섞인 결론을 내리곤 한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완독하지 않은 채 그 명제에만 천착한다면, 역사는 공부할 가치조차 없는 조작된 쓰레기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이는 카의 의도를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E.H. 카가 말한 ‘승자의 기록’의 본뜻
E.H. 카는 역사가 승자의 기록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를 다루는 학자가 기록 이면의 정황을 치밀하게 감안하여 접근해야 함을 역설했다.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시대의 사람들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관해서 기록을 남긴 사람들에 관해서도 세밀하게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역사란 무엇인가』 中
이 구절은 사료가 무용하니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 편향성조차 역사의 일부로 포섭하여 사실의 입체적인 실체를 찾아내라는 가르침이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두 개의 시선
역사가 승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사례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공존이다.
광해군 대에 북인들이 주도하여 편찬한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극복 과정에서 광해군의 공적을 강조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이 기록이 편향되었다며 효종 대에 『선조수정실록』을 다시 편찬했다.
놀라운 점은 서인들이 자신들의 시각을 담은 수정실록을 만들면서도, 기존 북인들의 기록인 『선조실록』을 파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비록 상대방의 견해가 틀렸다고 믿었을지언정, 그 기록 자체도 역사의 한 조각임을 인정하고 후대의 판단에 맡겼다.
『광해군일기』 지워지지 않은 패자의 숨결
『광해군일기』 역시 이러한 기록 정신의 연장선에 있다. 인조반정 세력인 서인이 편찬했기에 광해군과 북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할 것이라 오해하기 쉽지만, 그 보존 과정을 들여다보면 성리학자들의 치열한 직필 정신이 살아 숨 쉰다.
실록 편찬 당시 전란과 재정 부족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역사가들은 최종본을 인쇄하는 대신 수정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정초본을 그대로 사고에 보존했다.
최종 완성된 정본이 서인의 시각에서 광해군의 폐륜을 비판한다면, 정초본은 편집 이전의 날것인 기록들을 품고 있어 입체적인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정신, 승자의 기록을 넘어서다
우리는 정초본과 정본, 그리고 실록과 수정실록을 모두 보존해낸 당시 역사가들을 올바르게 평가해야 한다. 그들은 승자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패자의 기록을 말살하지 않고 나란히 두어 정치적 갈등 과정을 보존했다.
정초본에 남은 먹줄과 붉은 글씨의 수정 흔적은 후대 학자들이 어느 대목에서 승자의 시각이 개입되었는지를 객관적으로 추적할 수 있게 해준다.
괴력난신(怪力亂神)과 같은 비합리적 요소를 배격하고,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되 지어내지 않는다는 '술이부작'의 원칙을 지키려 애쓴 결과다.
우리의 몫
역사는 단순한 승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록을 남긴 이들의 편향성까지도 후대에 정직하게 넘겨주려 했던 역사가들의 정직한 노동이 깃든 산물이다. 그러니 역사를 폄하하기 전에, 그들이 남긴 기록의 틈새에서 실체를 보존하려 했던 그 뜨거운 분투를 먼저 읽어내야 한다.
브런치 연재를 시작할 때도 적었듯이 역사 공부는 겸손한 태도를 갖춘 후에야 제대로 시작된다. 치열하게 살다간 선인들에 대한 존경 없이 함부로 그들을 비판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몫이다. 특히 역사로 글을 쓴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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