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간]제국의 칼이 되버린 고려인

20화 홍다구

by 초로의 궁사

​홍다구의 이름 앞에는 늘 수식어가 붙는다. ‘홍복원의 아들’, ‘몽고의 장수’, ‘고려를 배반한 가문’. 그의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선택된 길 위에 있었다. 그러나 홍다구는 단순한 2세가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의 선택 위에서, 더 멀리, 더 깊이 제국의 전쟁 속으로 들어간 인물이었다.

​태생부터 분리된 정체성

​홍다구는 고려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언어와 군사 교육, 출세의 기준은 모두 제국의 것이었다. 그에게 고려는 돌아가야 할 고향이 아니라, 정복하고 관리해야 할 '제국의 변방'에 불과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아버지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홍복원이 고려를 떠난 사람이라면, 홍다구는 고려 밖에서 완성되어 고려를 짓밟으러 돌아온 자였다.

​제국의 칼, 고려의 숨통을 조이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서 홍다구가 보여준 모습은 '동족'에 대한 일말의 연민도 없는 냉혹한 집행자 그 자체였다. 그는 몽골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넘어, 고려의 사정을 잘 안다는 점을 이용해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고혈을 짜냈다.

​매질로 세워진 전함
2차 원정을 앞두고 쿠빌라이 칸은 짧은 기간 안에 900척의 전함을 건조할 것을 명령했다. 홍다구는 감독관으로서 고려의 장인과 민초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고려사》는 그가 "기한 내에 배를 만들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고려의 재상들조차 제국의 관리가 보는 앞에서 매질하며 굴욕을 주었다고 기록한다.

​고려 국왕에 대한 무례​
그는 고려의 왕인 충렬왕 앞에서도 칼을 찬 채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왕이 정중히 예우해도 그는 오만하게 대꾸했으며, 심지어 왕의 면전에서 고려의 신하들을 결박하고 끌어가는 등 국가의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았다.

​민초들의 눈물로 빚은 군량
몽골의 요구로 10만 석이 넘는 군량을 조달해야 했던 고려는 이미 초토화 상태였다. 홍다구는 집집마다 숨겨둔 식량까지 찾아내 앗아갔으며, 이로 인해 고려 전역에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비극적인 기근이 닥쳤다. 그에게 고려인은 함께 살아갈 동포가 아니라, 제국의 승리를 위한 소모품일 뿐이었다.


고려 왕실에 대한 원한

그 아비 홍복원은 그 '세치 혀'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 1258년, 몽골에 인질로 가 있던 고려의 태자(훗날 원종)와 입국 문제를 두고 다투던 중 "고려가 겉으로만 항복하고 속으로는 반역을 꾀한다"라며 모함을 했는데, 이를 지켜보던 원나라 정종의 황후 퇴레게네(혹은 당시 실권자들)가 그 이간질에 분노하였다. 결국 고려 왕실의 강력한 항의와 몽골 조정 내의 정치적 기류 변화가 맞물리면서, 홍복원은 대도(北京)에서 반역자이자 모함꾼으로 처형당했다. 이에 그 아들인 홍다구는 고려 왕실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게 되어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당시 고려의 충신들이 그 제물이 되었다.


​전쟁의 실패, 그러나 책임지지 않은 자​


​일본 원정은 실패했다. 태풍과 보급 실패로 몽고 연합군은 철수했으나, 홍다구는 몰락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정의 가장 큰 피해자는 전후 복구와 인명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은 고려였고, 가장 무사했던 사람은 패전의 책임을 교묘히 피한 홍다구였다. 그는 이후에도 몽고 체제 안에서 승승장구하며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는 '부원세력'의 정점에 섰다.


​홍다구는 배신자였는가


​홍다구를 두고 ‘배신자’라 부르는 것은 쉽지만, 그 말은 그에게 너무 단순하다. 그는 스스로 고려에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다. 그의 충성의 대상은 처음부터 몽고 제국이었다. 아버지가 갈등 끝에 선택했다면, 아들은 갈등 없이 그 질서에 적응했다. 그는 제국이 가장 선호하는 인재, 즉 정복지의 언어를 구사하며 동족을 가장 효율적으로 압박할 줄 아는 '엘리트 협력자'였다.


​제국이 만든 인간형, 국가가 버린 미래


​홍다구는 개인이라기보다 시대가 만든 비극적 인간형이다. 그의 삶을 도덕으로 재단하면 분노가 남고, 구조로 보면 이해가 남는다. 홍다구는 고려인이었으나 고려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을 향해 칼을 들었으나, 그 칼날은 일본에 닿기 전 이미 고려 민중의 심장을 먼저 긋고 지나갔다.


​국가가 개인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할 때, 혹은 국가라는 이름이 개인의 욕망보다 작아질 때, 다음 세대는 누구의 사람이 되는가.


홍다구는 그 질문에 대한 가장 냉혹하고도 시릴 만큼 아픈 답이다.


1291년, 지천명을 코 앞에 두고 48세에 사망한 홍다구는 쿠빌라이 황제로부터 위국공에 봉해지고 '무충(武忠)'이라는 시호를 받았지만, 그의 아비와 함께 고려사 반역전(叛逆傳)에 영원히 박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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