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인간] Welcome to the jungle

24화 이숭인 < 정도전 < ?

by 초로의 궁사

“Welcome to the jungle!”

록밴드 Guns N' Roses의 데뷔곡 얘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인생 얘기다. 지천명의 나이가 되면 고고하게 사는 법만으로는 위험하다. 내 뒤통수는 결국 내가 지켜야 한다. 세상에는 언제나 정글의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점잖은 선비들만 있을 것 같은 우리의 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대 최고 문장, 그리고 친구의 극찬​

도은(陶隱) 이숭인은 목은 이색 문하에서 수학하며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정도전, 정몽주와 함께 공부한 동문이었다. 고려 말 사대부 가운데서도 그의 문장은 특별했으니 길재를 제외한 ‘고려 삼은’에 포함되기도 했고, 야은 길재까지 더해 ‘고려 사은’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정도전과의 관계는 각별했다.
공민왕 사후 정치적 격랑 속에서 친원 세력에 반대하다 함께 유배를 가기도 한 ‘고난의 동지’였다. 정도전은 그의 문집 서문에서 이렇게 찬탄했다.

글은 마음에서 싹트고 기운으로 드러나며, 말로 뿜어져 나와 문장이 된다.
마음이 바르고 기운이 순수하면 문장은 저절로 빛난다.
내가 도은과 사귄 지 20년, 그의 가슴은 맑고 넓으며 기운은 온화하면서도 곧다.
그의 시는 억지로 꾸민 것이 아니라 하늘의 기틀이 움직여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1386년 정도전의 서문 중 발췌>>​

산에 구름이 피어오르고 들판에 안개가 스미는 듯한 문장.
물 위에 바람이 스치고 달빛이 흐르는 듯한 시.
정도전은 그의 문장을 그렇게 묘사했다.

반전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문장처럼 흐르지 않는다.
고려 말,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 개혁 세력과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 세력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이숭인도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결국 그는 폐서인이 되어 이감되던 중, 정도전의 측근이었던 황거정에게 장형을 맞고 사망하는데 그 해가 1392년, 친구가 남긴 극찬의 서문을 받은 지 불과 6년 만의 일이었다.

추측컨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일부에서는 ‘표전문 사건’과 연결해 해석하기도 한다. 조선 건국 직후, 명 태조 주원장은 조선이 보낸 외교 문서의 문구를 문제 삼아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했다. 이때 대안으로 거론된, 명에 파견할 사신 후보가 바로 이숭인이었다. 그의 문장은 이미 명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경쟁자의 부상은 위협이다.
정도전이 온건파와의 연계를 빌미로 그를 제거했다는 해석도 여기에서 나온다. 물론 이것은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 하나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권력의 역학 속에서 인간 관계가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지를 보여 주기에는 충분하다.

정글의 법칙

불과 몇 년 전까지 함께 유배를 갔던 친구.
서로의 문장을 읽고 밤을 새우던 동지.
그러나 정치의 파도는 그 관계를 사냥꾼과 먹잇감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도전에 비해 정치적으로 열세였던 이숭인은 결국 가장 약한 고리가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선비의 나라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냉혹한 현실이 존재했다.
권력 앞에서 우정은 언제든 시험받는다. 의리를 앞세우던 시절에도 그랬을진데 요즘을 사는 우리는 어떨까?

그의 문집 『도은집』은 사후 14년 뒤인 1406년에 어명에 의해 간행되었다. 정도전의 서문도 함께 실려 있으니 이것은 정도전의 표변함을 드러내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이 책의 간행을 명한 인물은 바로 이방원, 즉 정도전을 처단한 태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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