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학봉 김성일
일본 식민사관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깊은 상처는 만주의 상실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춰 보는 자기비하의 습관이다. 그 가운데서도 핵심은 조선이 당파 싸움에 빠져 국가를 망쳤다는 이른바 ‘당파성론’이다. 그 대표적 사례로 늘 등장하는 사건이 있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 통신사들의 엇갈린 전쟁 예측이다.
서인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했고, 동인 김성일은 전쟁의 징후가 뚜렷하지 않다고 보고했다. 이후 전쟁이 발발하자 이 사건은 곧바로 “당파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서사로 굳어졌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통신사 내부의 의견 차이는 당파의 문제라기보다 각 개인의 정세 판단 차이에 가까웠다. 전쟁을 경고한 동인도 있었고, 낙관적인 서인도 존재했다. 조선 조정 역시 일본의 움직임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 아니라, 내부 동요와 전쟁 대비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당시 통신사 부사였던 김성일 역시 침략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전쟁 가능성만으로 조선을 즉각적인 전시 체제로 몰아넣을 경우, 사회 전반의 혼란과 경제적 붕괴가 더 큰 위험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틀렸다. 그러나 그것은 무책임한 낙관이 아니라, 국가 운영을 고민한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정세 판단에 실패한 이 관료는, 이후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든 전쟁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실패를 딛고 의병의 대부가 되다
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일은 책임을 면하지 못했다.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던 그는 정치적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를 구해낸 것은 유성룡이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후가 더 중요했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물러나지도 않았다.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된 그는 최전선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미 전쟁의 공포와 패배의 소문으로 무너져 가던 지역이었다.
부임 직후 그가 발표한 ‘창의문’은 경상도 의병 활동의 불씨가 되었다.
“죽는 것은 한 번뿐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 개와 돼지의 죽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신하와 자식된 도리이니, 뜻 있는 자들은 각기 의병을 일으켜라.”
이 한 문장은 영남 지역에 불길처럼 퍼져 나갔다.
곧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 수많은 의병이 봉기했다. 그러나 김성일의 역할은 단순한 선동이 아니었다. 그는 의병과 관군을 연결하고, 각 지역의 전투와 보급을 조정했다. 전쟁 초기 조선군이 무너진 상황에서 민간과 군을 하나로 묶어내는 행정적 중심이 바로 그였다.
진주성 방어를 위한 지원과 병력 조직 역시 그의 손을 거쳤다. 이는 훗날 김시민이 이끈 진주대첩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정세 판단에는 실패했지만, 전쟁 수행에서는 누구보다 치열했다.
붉은 옷의 장군과 흰 도포의 선비
전쟁 초기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홍의장군 곽재우였다. 그는 관군이 도망친 뒤 남겨진 창고를 열어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이를 본 경상감사 김수는 그를 반란군으로 판단하고 조정에 보고했다. 자칫하면 의병이 반역자로 몰려 사라질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이때 김성일이 직접 현장을 조사했다.
그는 곽재우가 사재를 털어 군사를 모은 충의의 인물임을 확인하고, 감사의 보고를 반박했다. 그 결과 곽재우는 처벌을 면했을 뿐 아니라 공식 의병장으로 인정받고 물자 지원까지 받게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상관과 부하가 아니었다. 자존심 강한 의병장과 중앙 관료는 서로를 경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김성일은 그의 기개를 진심으로 존중했고, 곽재우 역시 그런 김성일을 신뢰했다.
과로로 기록된 죽음
1593년, 진주 진중에서 김성일은 역질에 걸렸다.
그러나 후대 기록은 그의 죽음을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과로’로 기억했다. 전쟁 직전의 판단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그는 초유사 업무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병력 모집, 행정 정비, 민심 수습, 군량 확보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곽재우의 손을 붙잡고 마지막 부탁을 남겼다.
“진주성을 끝까지 지켜 달라.”
그 말을 들은 곽재우는 아이처럼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그는 선무원종공신 1등에 추서되었다.
그의 11대 종손 김흥락(1827~1899)은 을미의병(1895) 당시 영남 만인소를 주도하며 항일 의병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직접 칼을 들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제자가 의병에 나섰고 의성 김씨 문중에서는 50여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되었다.
#김성일#학봉#곽재우#진주대첩#임진왜란#류성룡#의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