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원교 이광사
조선 후기, 억압적인 정치적 풍랑 속에서도 우리 고유의 미학을 꽃피운 예술가가 있다. 바로 원교(圓嶠) 이광사다. 그는 소론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나주 괘서 사건('간장게장과 홍시, 그 위험한 궁합' 글 참조)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20여 년의 세월을 변방의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다. 심지어 그가 극형에 처해졌다는 오보를 듣고 부인이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유배지에서 처절하게 절규해야만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절망의 시간은 조선 서예의 새로운 길을 여는 축복의 시간이 되었다.
이광사가 유배길에 오른 때는 그의 나이 쉰한 살. 흔히 말하는 ‘지천명’의 문턱에서 그는 가문의 몰락과 평생의 유배라는 가혹한 천명을 맞닥뜨렸다. 그러나 지천명의 통찰은 때로 세상이 정해 놓은 울타리, 곧 번리(籓籬)를 걷어내는 데서 시작된다. 붓 끝에서 ‘참됨(眞)’을 구하겠다는 그의 선언은, 남의 시선이나 사회적 지위라는 허상을 벗어 던지고 오직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겠다는 다짐이었다.
이광사가 정립한 동국진체(東國眞體)는 단순히 글씨를 잘 쓰는 기술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의 서예계는 중국의 서법을 모범으로 삼는 것이 당연한 풍토였다. 많은 서예가들이 중국 명가의 필법을 모사하며 형식적인 아름다움에 치중했다. 그러나 이광사는 그 흐름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우리 땅의 자연과 우리 민족의 기상을 붓 끝에 담아낼 수 있는 ‘조선의 글씨’를 만들고자 했다.
그의 필치는 살아 있는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기운생동(氣運生動)을 특징으로 한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인위적 아름다움보다는 거칠더라도 살아 있는 힘, 곧 골력(骨力)을 중시했다. 이 미학은 그가 깊이 공감했던 양명학의 지행합일 정신과도 통한다. 마음속의 참된 이치를 꾸밈없이 밖으로 드러내는 것—그것이 바로 동국진체의 핵심이었다.
유배지의 거친 바닷바람 속에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특히 전남 신지도에서의 세월은 그의 예술이 완숙해지는 시간이었다. 전국의 선비들이 바다를 건너 그의 글씨를 배우러 왔고, 그는 그들에게 조선 서예의 독자적인 이론서 《서결(書訣)》을 전수했다.
이광사가 개척한 길은 훗날 또 다른 거대한 서예가에게 이어진다. 바로 김정희다. 그의 추사체가 탄생하기까지, 원교의 동국진체는 조선 서예가 중국의 그늘을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찾는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硏精翰墨造天工
글씨 정밀하게 연구하여 천공의 경지에 나아가고
意賁文明耀大東
문명으로 우리 나라 빛내려 하였으나
白首投荒無活計
머리 새어 변방에 던져져 살아갈 계책 막연하니
事居鹽米斗升中
소금 쌀 몇 되에 살기를 전념하네
이광사, <원교집> 중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을 보고 조선의 글씨를 망쳐 놓았다며 현판을 떼어내게 하였다. 후일 새 현판을 써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8년 뒤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던 길의 추사는 자신이 떼어내게 했던 원교의 현판을 다시 걸게 하며, 그 글씨가 참으로 좋다고 고백하였다.
(대문 이미지 참조)
#이광사#추사#김정희#양명학#이긍익#대흥사#동국진체#서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