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심어준 라일락 나무

by MiddleMan

저녁 7시 어둑어둑해질 무렵

오랜만에 본가에 가서 엄마아빠랑 외식을 하고 나오는데 어디선가 강한 꿀향이 풍겨왔다. 향기를 따라가니 가로등 아래에 활짝 핀 라일락 서너 그루가 있었다.



나는 라일락의 은은한 색과 향에 취해 코를 냅다 박고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나무 저나무 번갈아가며 향기를 흡입하는 나를 보더니 아빠가 한마디 하셨다.

우리 딸이 이렇게 라일락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며칠 뒤 회사에서 졸음을 쫓으며 일하고 있는데 아빠가 휴대폰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주셨다.



라일락 2그루, 미쓰김 라일락 5그루 식재 완료
내년 이맘때쯤 꽃이 필 거야^^


문자를 보자마자 사무실 어딘가에서 라일락 향기가 풍겨오는 것만 같아 혼자 조용히 피식 웃었다.


우리 아빠는 참 따뜻한 사람이다.

삶이 힘들고 버겁다며 그냥 다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자주 드는 요즘. 나는 아빠 문자를 보고 금쪽같은 딸내미가 철없고 못난 생각을 했구나, 싶어 한없이 미안했다.


아빠도 나처럼 서른 살에는 이렇게 삶이 고단 했을 텐데,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힘들었겠지. 결혼해서 막중한 책임감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으니.

60년 넘게 쉼 없이 달려오면서 주저 않고 싶고 내려놓고 싶은 순간이 더 많았을 텐데. 그 시간들을 다 지내고 이제는 하나뿐인 딸의 메말라가는 마음에 라일락의 향기를 불어넣어 주려는 아빠의 마음이 너무 따뜻하고 고마웠다.


이렇게 내년, 내후년, 그 후에도 오래도록 힘차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고마워, 라일락.

감사해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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