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혁은 버추얼 장비를 착용하고 온라인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게임에 집중하지 못하고 게임타이틀을 바꿔가며 맛보기만 하는 중이다. 그래도 곧 지루해진다. 이번에는 장비를 벗고 TV를 켰다. TV도 4D 입체영상이다. 리모컨으로 아래위로 채널을 바꿔도 지겨운 건 똑같다.
“가상현실이라더니 현실 비슷하지도 않네. 포에버월드 가면 나도 이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더니, 가능한 늦게 죽어야지. 죽지말든가.”
전화벨이 맹렬히 울렸다. 게임에 열중하다가 비즈니스콜을 놓칠 수 있어 벨소리를 크게 해놓았다. 전화는 포에버월드에서 온 것이다.
“아웃라인 통화요청이요?”
짜증부터 난다. 연결한지 얼마나 됐다고 아버지에게 또 통화요청이 온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누구요? 윤지호?”
들어본 이름이다. 윤지호.. 설마?
“기다려요. 바로 갈 테니까.”
모털 컴퍼니 클리닉에 도착했는데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지현우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직원이 아웃라인 통화를 연결해줬다.
=현우씨?
당연히 지현우가 받을 것이라고 예상한 눈치다.
“아닌데요?”
=네? 그럼 누구세요?
듣던 것과 달리 목소리가 밝고 명랑하다. 얼굴이 보고 싶다. 기술팀 직원에게 눈치를 주자 모니터에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하얗다.
동시에 윤지호도 모니터를 통해 박민혁의 얼굴을 확인했다. 현우가 아니어서 실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지현우씨는 어딨어요?
“모르는데. 나도 갑자기 연락받고 온 거라서. 그러는 그쪽은 어디 있었어요? 지팀장이 한참 찾았는데.”
모니터상에 비친 지호는 어딘지 꿈꾸는 듯한 얼굴이었다. 지나치게 하얀 얼굴과 갸름한 얼굴, 선이 가늘지만 주관은 뚜렷할 것 같다.
=누구세요? 왜 현우 대신 제 전화를 받는 거죠?
목소리에 경계심이 가득하다.
“그러게요. 왜 나한테 연락왔지? 아, 혹시 보호자 연결 요청했나요?”
=네.
“그렇군. 내가 계약서상 윤지호씨 보호자인 박민혁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자신의 보호자를 칭하는 박민혁의 얼굴과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 지호는 경계심을 조금 풀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제 비용을 대신 분...?
“이제야 이해하시네. 내가 그 사람입니다. 거기는 지내는데 불편한 점은 없어요?”
=네.
대화가 끊겼다. 서로 어색하다. 지현우는 어디갔을까?
“지팀장 연락해 줄까요? 연락하면 바로 올 텐데.”
=네. 그런데 뭐하나 물어봐도 돼요?
다시 경계하는 얼굴이다.
“네 물어보세요.”
=여기로 오기 전에, 그러니까 의식전송 전에 여기서 내가 할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알고 있어요?
박민혁은 조금 망설였다. ‘미인계’와 관련된 얘기는 지현우가 하기로 했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긴 한데, 중요한 건 아니지만, 지현우 팀장과 무슨 사이에요?”
=그건 왜 물어요?
지현우는 윤지호에 대해 ‘좀 아는 여자’라고 했을 뿐 자세한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남녀관계에 친인척이 아니라면 ‘좀 아는 여자’가 뭘까?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사정이 윤지호의 얼굴을 대면하고 나니 궁금해진다.
“그쪽이 해줘야 할 일과 관계 있어서 그런데.. 됐습니다. 그런 건 지팀장과 얘기하세요. 곧 불러줄 테니. 그럼 끊고 지팀장 오면 통화해요.”
=잠깐만요. 나와 현우씨 관계가 일하고 관계있다는 거죠?
똑똑한 여자다. 박민혁은 여기서 잘못 말했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의뢰하고 돈만 댔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지팀장과 얘기해야 합니다.”
엉겁결에 연결을 끊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지현우에게 전화했다. 뭘하고 있는지 연결되지 않았다. 민혁은 메시지를 남겼다.
::: 윤지호 연락됨. 연락해보기 바람.
다른 말을 좀 더 쓸까하다가 지워버렸다. 이를테면 어떤 관계냐는.. ‘에이 무슨 관계면 어때. 일만 해주면 되지’
모털 컴퍼니 클리닉을 떠나는데 지현우에게 전화왔다.
=정말 연락 왔습니까?
“왜 이제 연락해? 내가 보호자로 등록돼 있어서 나한테 먼저 연락 온 거 같은데, 현우씨가 연락해봐.”
‘미인계’같은 껄끄러운 말은 어서 떠넘기고 싶다. 겉은 젊어보여도 속은 70 먹은 노인네인데, 노인네 꼬셔서 계좌번호 알아내라는 말을 어떻게 하나?
=지금 아웃라인 연결돼 있어요?
지현우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뭔 소리야? 벌써 끊고 나왔지. 그거 통화료가 얼만데. 내가 폭포수처럼 돈이 넘치는 줄 알아?”
=그걸 끊으면 어떡해요? 다시 연결 안 된단 말이에요.
전화기 너머 지현우가 짜증낸다. 이 자식이?
“흥분하지 말고 알아듣게 말해. 다시 연결 안 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가서 설명할게요. 지금 가고 있으니까 다른 데 가지 말고 거기 있어요.
지현우가 전화 끊었다. 그냥 어이없다. 누가 갑이고 을인지 모르겠다. 박민혁은 할 수 없이 차를 돌리고 클리닉 주차장에 주차했다. 들어가서 휴게실에 있을까 했지만 모털 컴퍼니 건물,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쁘다. 밖은 회색인데 안에는 하얗고. 겉과 속이 저렇게 달라서야 고객과 신뢰가 있을 수 있나?
아버지 박장우의 전신 업그레이드만해도 그렇다. 기술적으로 외형을 고치는 게 가능하면 정식 상품을 내놓고 팔면 되지, 겉으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뒷돈을 받고 해주는 이유는 뭔가? 포에버월드 거주민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앞뒤가 안 맞는 변명일 뿐이다.
담배를 물었다. 차량에 설치된 공기정화장치로 뿌연 담배연기가 빨려 들어간다. 담배를 물지 않는 동안은 차가 대신 흡연하는 것 같다. 자신의 돈도 마찬가지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다른 놈 주머니로 술술 흘러 들어간다. 대표적인 놈이 모털 컴퍼니, 포에버월드 안의 물건 값이 현실 세계 물건 값과 맞먹는다는 게 말이 되나? 기껏해야 컴퓨터 코딩일 뿐인데.
곧 지현우의 차가 도착했다. 저놈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멀끔한 척하면서 속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지현우는 차문을 두드리더니 문이 열리자 타라는 말도 안 했는데 박민혁의 옆좌석에 털썩 앉았다. 차안에 남아있는 담배냄새에 얼굴을 찡그린다. ‘한마디만 해봐’ 그러나 불평하지는 않았다.
“설명부터 해봐. 연결할 수 없다니.”
민혁도 짜증났다. 간단할 거라 생각했던 작전이 처음부터 꼬이고 있다.
“우리가 거주민에게 직접 아웃라인 면회를 호출하려면 거주민의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지호는 위치정보가 없어요.”
지호? 지금 이름으로 불렀어?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지현우는 흥분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홈타운을 수동으로 뒤져서 어디 있는지 좌표를 특정할 수 있으면 연결이 가능한데 숨어있거나 자꾸 이동하면... 힘들죠.”
“그럼 뒤져서 찾아내! 그게 당신 일이잖아.”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요? 인형의 집 들여다보듯 볼 수 있는 거면 고민도 안 하죠. 위치코드가 없으면 버추얼로 연결하고 직접 들어가서 일일이 찾아야 해요. 쇼핑몰에서 잃어버린 아이 찾는 것과 똑같이, 아니 그보다 어려워요!”
절망한 듯 말하는 지현우의 얼굴을 보면서 박민혁도 상황이 녹록치 않음을 짐작했다. 그러나 지현우의 표정은 단지 그 정도가 아니다. 엄밀히 자기 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윤지호라는 여자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뭐지?
“그 여자하고 무슨 관계야?”
민혁이 물으니 지현우는 즉답을 피했다.
“그냥 좀 아는 여자에요. 다른 일 때문에 병원에 갔다가 알게 된.”
“그것뿐이야? 지금 그 여자를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같은데 아니야? 다른 관계는 없어?”
“다른 관계 뭐요?”
지현우가 박민혁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를테면 예전에 사귀었다든가.”
“그걸 말이라고 해요? 사장님 같으면 자기가 사귀던 여자를 죽은 노인한테 붙여서 정보를 캐내라고 하겠어요?”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자꾸 성질이야? 어쨌든 당신이 다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까 책임져! 정 안되는 거면 그 여자는 빨리 포기하고. 엉뚱한데 돈 쓰지 말고.”
윤지호의 계약기간은 최소 약정인 1년이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돈이 그녀의 거주지와 활동 가능한 홈타운 맵을 유지하는데 들어가고 있다.
“지금 연락 안 된다고 윤지호씨에 대한 지원을 끊겠다는 말입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일도 못 시키는데 왜 쓸데없이 돈을 써?”
지현우는 화가나 미칠 지경이 됐다. 더 말하다가는 큰 사고를 칠 거 같아서 박민혁을 보기만 하다가 차문을 열고 나왔다. 박민혁이 창문을 열고 물었다.
“어디가?”
“클리닉에요. 찾아보라면서요? 어떻게든 찾아야죠.”
클리닉에 돌아온 지현우는 기술팀 직원에게 말했다.
“모니터하다가 윤지호씨 보호자 연결요청 오면 나부터 바꿔줘.”
지현우의 지시는 프로토콜 위반이다.
“보호자 연락하기 전에요? 그래도 됩니까?”
“기술적 문제가 있어서 그래. 보호자 동의도 받았어.”
현우는 박민혁과 통화연결 기록을 찾았다. 발신 위치는 윤지호의 홈타운 외곽의 레스토랑이었다. 그곳을 기준으로 윤지호의 위치를 추적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그녀가 활동할 수 있는 맵 크기는 박장우처럼 무제한은 아니라도 꽤 큰 편에 속했다. 그만큼 수동으로 찾기 어렵다는 뜻이다.
현우는 윤지호의 거주지에 메시지를 남기기로 했다. 기술팀에서 보낼 수 있는 메시지는 몇 가지로 제한돼 있었다. 그중에서 지호가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은 뭘까?
::: 클리닉 기술지원팀입니다. 포에버월드 이용 안내를 위해 콜센터 연결을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