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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n 19. 2023

기다림의 끝은 어디인가?

고도를 기다리며



드라마 <호텔 델루나> 중 이 장면을 기억하시는 분?

극중 아이유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시간 속에서 객점 2층에 올라 먼 하늘을 보고 있다.

'델루나'라는 망자전용 호텔 주인 행세를 하며, 살아있는 망령으로 1300년을 살면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원수일수도, 연인일수도 있다.

그를 만나면 죽일수도 있고 껴안을수도 있다. 어쩌면 둘다 일수도...


천년을 넘어 기다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늦더라도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좀 나으려나?  


그 사람이 올지, 안올지 모르는 막연한 기대감 속에,

시간마저 부서질 것 같은 긴 세월을 보내면서..

나중에는 누구를 기다리는지. 뭘 기다리는지 조차 모두 잊는다.

그리고 오직 '기다린다'는 삶의 관성만 남게 되겠지. 슬픈 일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도 극중 두 인물은 '고도'라는 인간을 기다리고 있다.

일단 50년을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물론 연극이 끝날 때까지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

역시 올지 안 올지는 커녕 '고도'가 사람인지 다른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존경하는 비평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베케트는 인간의 삶을 단순한 기다림으로 정의하고 있다"

아, 정말 그러한가?

그래서 나도 이렇게 무의미하게 뭔가를 기다리나?


나의 첫 기다림은 헤어진 첫사랑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다른 사람이 좋아졌어. 이제 널 사랑하지 않아."

이렇게 못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고 그녀는 휙 가버렸다.

행여 그런 애가 내게 연락할 일이 있겠나? 결국 먼저 연락한 건 나였다.

"잘 있어?"  

"응. 왜 연락했어?"

"그냥..."

그렇게 첫 기다림이 끝났다.


두 번째 기다림은 어떤 의미에서 첫 기다림보다 심플했다.

여러 소설을 쓰고 여러 공모전에 응모하고 '당선자 개별 연락'을 기다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철길을 걷는 것처럼 꽤나 지치게 기다리다 이제 틀렸다, 생각하고 포기했을 때 난데없이 연락이 왔다. 하, 당선이란다.

그러나 그때는 그게 진정한 기다림의 시작이라는 것을 몰랐다.

나의 글이 쓰고 싶을 때 쓰고,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수준을 지나치면서 나는 십중팔구 망하는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 잘못 걸렸다!


지금은 세 번째 기다림이 진행 중이다.

기다림의 끝이 그렇듯이, 나도 이 기다림에 끝이 있을지, 이제는 뭘 기다리는지 조차도 모른다.

막연하게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 하얀 구름 위에 창을 꼬나 든 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망상하면서 허무하게 기다린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4개의 모니터 사이 조그만 틈 밖으로 시선을 탈주시키며, MS워드 백지장 위 외눈박이 커서의 깜빡거림을 노려보며 뭔지 모를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나는 그저 '끝'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이 모든 것의 끝을.

"제길, 이제 충분해! 제발 끝내란 말이야!"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내 인생의 엔딩을 향해 어서 오라고 외치고 싶다.


그런데 조금은 두렵다.

정작 끝이 오면 나는 그것을 껴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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