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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May 23. 2024

그녀와의 거리 4광년

내이름은 소설가다. 그녀의 이름은 인기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아, 이 말은 잘못됐다. 나는 한번도 그녀를 제대로 본 적 없고 알지도 못하니 사랑한다는 말은 섣부를 수 있겠다. 그녀의 취향도 모르고, 어떻게 하면 그녀를 놓치지 않고 붙잡을 수 있는지도 전혀 모른다. 

정정하면 나는 그녀를 그리워한다. 언제가 만날 수 있을지, 먼 발치라도 볼 수 있을지 감도 안 잡히지만 그리워하는 건 백퍼센트 사실이다. 

어떻게 해도 잡히지 않는 그녀 때문에 몇번이나 좌절하고 꽤 오랜시간 그리워하기를 그만둔적도 있지만 또 이렇게 돌아왔다. 미친놈. 미친놈. 상사병은 약도 없다는데. 


난 대충 그녀와 나의 거리가 4광년이라고 생각한다. 4광년이라는 거리는 빛의 속도로 날아도 4년 걸린다는 먼 거리다. 드라마 <삼체>에서 지구와 컨택트한 외계문명의 거리가 4광년이다. 차원이 다른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는 외계문명도 지구에 도달하기까지는 400년이 걸린다는데.. 내 속도로 언제 그녀에게 가까워 지겠는가? 

애당초 이 세계에 발을 디딘게 잘못이다. 아니었으면 애초에 그녀를 알지 못했을 것이니까. 

남탓은 취향이 아니지만 오늘은 남탓을 하는 날이다. 내 달력에는 있다. 그런 날이.


내게 글을 가르쳐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참고로,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어머니는 나를 낳기도 전, 20대에 이미 문단의 주천으로 '작가' 타이틀을 갖게 된 원로작가시다.)


어머니는 글짓기 숙제를 하고 있는 나를 우연히 보시고는, 기본적인 철자법도 모른다는데에 충격받으셨다. 

그때 나이가 10살, 그냥 넘어가도 되는데 조막손으로 어렵게 가득 채운 원고지 5장에 어머니는 지워지지도 않는 빨간 싸이펜으로 여기저기 수정을 가했다. 하는 김에 오탈자뿐 아니라 어설픈 표현도 바꾸시고. 띄어쓰기도.


나는 글짓기 숙제를 완성하려면 최소 5번은 원고지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다. 이런 날들이 여러 번 반복됐지만 내 맞춤범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표현은 당연히. 띄어쓰기도.     

그게 내 반항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결코 좋아지지 않으리라 의지를 보이는. 어쨌든 어머니는 몇 달만에 글쓰기 지도를 포기하셨다. 


'넌 글에 재능은 없는 것 같다.'


그때의 트라우마로 난 아직도 맞춤법이 서툴고, 한글과 띄어쓰기를 발명하신 세종대왕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글쓰기의 패배자로 살았어야 했다. 어머니는 나를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게 화근이었다. 담임선생님과 사이가 안 좋았던 나는 매일밤 자발적으로 담임을 욕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검사 받는것 아니었으니 우수운 자물쇠까지 채우고. 


그리고 최악의 날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 한글날 백일장. 주제는 '가훈'이었다. 그냥 전교생이 다하는 연례행사일 뿐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쓴 내 수필이 장원에 당선됐다. 나도 놀랐지만, 가장 충격받은 사람은 어머니셨다. 글에는 재능이 없는 아들이 장원을 받아왔으니 심사에 문제가 있는것 아니냐며 내 수필을 면밀하게 재검토하셨다.


"아들, 너 재능있어! 그동안 뭘 한거니? 근데 맞춤법은 여전히 문제네."


난데없이 글재능이 있는 아들이 된 나는 갑자기 실력이 일취월장하더니 대학에 가서도 학보에 단골 기고자가 되었고, 졸업생 소감을 대표로 쓰기도 했다. (이때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해 친구들에게 보여주곤 했다.)


어머니 역시 나를 볼 때마다 글에 대해 이것저것 조언하셨다. 


"하고 싶은 말을 앞에서 다 쏟아내지 말고 조금 숨겨놓았다가 천천히, 나중에 쓰윽 흘려줘."


이 말씀은 머릿속에 각인돼 지금까지도 바이블처럼 여기는 구절이다.      


첫사랑의 슬픔에 좌절해 있을 때는 '사랑밖에 몰랐던 철없던 시절이여.. 바이런.' 이런 멋진 말을 툭 던지고 지나가고, 유진 오닐과 안톤 체홉의 위대함에 대해 특유의 작가 감성으로 얘기도 해주셨다. 


전부 어머니 잘못이다. 글의 첫번째 독자는 바로 '나 자신'이며, 쓰는 것이 읽히는 것보다 더 재밌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것도 어머니였으니까. 


원래는 철학과 교수가 꿈이었던 내가 기자가 된 것은 '글 써서 돈 벌어서 내 힘으로 공부하자'는 나이브한 생각 때문이었다. 기자는 절대 글 써서 돈 버는 사람이 아니다. 네버! 


정신없이 기자생활을 하며 승승장구하던 나는 어느새 경제부장이 돼 있었고, 회사에서 쎄게 물 먹던 날 다시 소설을 쓰기로 다짐했다. 바쁠 때는 쳐다도 보지 않다가 한가해지니 '그녀'가 그리워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도 나쁜놈이다. 미친놈 플러스.


어째어째 단편소설로 등단에 성공해 공식 소설가가 됐지만 여전히 나의 꿈은 4광년 너머에 있다. 왜냐하면 알고 보니 내 꿈은 그냥 소설가가 아니라 인기소설가였던 것이다. 


클래식기타도 좋지만 내 격정을 표현하기에는 소리가 작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소설을 쓰는 것도 좋지만 내 소설은 인기가 없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냥 '인기 소설가'가 아니라 '인기'와 '소설가'가 연인처럼 꽉붙어 있는 '인기소설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심지어 이건 금지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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