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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Aug 30. 2019

와인과 친해지는 방법

비즈니스 미팅을 앞두고 나는 조금 일찍 도착했다. 상대편에서 잡은 저녁 장소는 이탈리언 레스토랑이었다. 마땅한 할 일을 찾지 못해 와인리스트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동안 제법 많은 와인을 마셔봤다고 생각했는데도 리스트에는 처음 본 와인이 훨씬 많았다. '와인의 종류는 하늘의 별보다 많다고 하더니만, 역시나.'


그녀는 정시에 도착했다. 이전 세미나에서 통성명 정도는 했던 사이어서 명함 교환 같은 형식적인 절차는 생략됐다. 적당한 저녁 메뉴를 주문하자 웨이터가 '부담스러운' 숙제를 던졌다.

“와인은 어떤 걸로 준비할까요?”

의례적으로 와인 선택권은 주최자가 아닌 초대객에 넘겨진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좋아하는 와인으로 하세요.”


저녁 메뉴에 잘 어울리는 와인을 고를 정도의 능력은 없으니, 상대도 좋아할 만한 무난한 맛에 적당한 가격의 와인을 골라야 하는 중책이 내게 부여된 것이다. 

얻어먹는 자리라 하여 생각 없이 비싼 와인을 주문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고, 그렇다고 맛을 모르는 와인을 주문했다가 실패한다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새로운 와인을 탐험할 기회는 사라진다. 아는 맛의 와인을 주문하는 게 안전하기 때문.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니까.


캘리포니아 와인, 켄우드(Kenwood) 2009년산을 주문했다. 캘리포니아는 항상 날씨가 좋으니 빈티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다는 점도 선택에 한몫했다. 그리고 웨이터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소몰리에는 아니겠지?’

만약 식사 주문을 받았던 웨이터가 소몰리에였다면 그의 표정에서 나의 선택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하게 주문을 받아 적고 우리 테이블을 떠났다. 다행이었다. 


와인을 오픈하고, 테스팅은 생략했다. 

“그냥 따라주세요. 마셔보고 진짜 이상하면 말할 게요.”

불편한 식사 자리를 부드럽게 하려는 농담이었다. 맛을 잠깐 본다고 알 수도 없고. 잘 모르는 사람 앞에서 아는 척했다가 우습게 보일 걱정도 됐다. 


미팅은 무난하게 진행됐고 와인도 먹을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처음에 한 모금 마신 뒤 더 이상 와인에 손대지 않았다. 

“와인이 입에 안 맞으세요?”

그럴 거면 직접 고르지 괜히 나에게 넘겨서는, 미미한 짜증과 후회가 올라왔다. 

“그건 아니고, 부장님은 와인 좋아하시나 봐요?”

평이한 질문인데도 내가 듣기에는 이렇게 들렸다.

넌 이게 맛있니? 음식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녀는 대기업 이사, 스톡옵션을 행사해 부자 대열에 합류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녀의 저택, 지하 와인셀러에 줄줄이 전시된 와인 병들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아른 거렸다.  

“좋아 한다기 보다 친해지는 중입니다. 더 친해지면 좋아할 것도 같구요.”

기분은 상했지만 표내지 않기 위해 우회적으로 말했다. 좀 전까지 입에 착 감겨 붙던 캘리포니아 와인의 실키한 맛이 텁텁하게 변하고 있었다. 


최대한 숨기려고 했지만 그녀 역시 직위에 걸맞는 분위기 파악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내 기분이 상한 것을 대번에 알아챘다.

“미안해요.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전 와인 맛을 몰라서 그래요. 전부 비슷한 것 같은데 사람들이 물어보면 대답하기도 힘들고. 그래서 잘 마시지 않는 편이에요.”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내 오해가 얼마나 속물적으로 비쳐졌을까?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내키지 않아 더 마시지 않은 것뿐인데, 왜 내가 주문한 걸 안 마시냐고 시비를 걸었단 말인가?

“사과는 제가 하겠습니다. 혼자 또 망상의 탑을 쌓아올렸네요. 제가 주문한 와인이 입에 안 맞아서 안 드시는 줄 알고.”

이것으로 와인 갈등은 제쳐 졌고 원래 목적대로 비즈니스 대화에 열중했다. 그 와중에 몇 번 와인에 눈이 갔지만 나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후식이 나왔다.

“사실 오늘 나오기 전에 부장님께서 와인을 잘 아는 분이라고 듣고 기대를 좀 하고 나왔어요. 좀 전에 와인과 친해지는 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도 친해지는 방법을 좀 알려 주시겠어요?”

그녀 역시 표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벤처사업에 투신해서 경쟁을 뚫고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그녀는 어떤 노력을 했을까? 일일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새로 배워서 익숙해져야 하는 것들의 수는 상당할 것이었다. 그 중에서 와인 하나 빠진 게 뭐 대수라고. 

진지함에는 진지함으로, 난 제대로 설명하기로 다짐했다. 

“먼저 기준이 되는 와인을 정해야 합니다. 비교적 무난한 맛의 와인으로. 제 경우에는  끼안띠 클라시코(Chianti Classico), 이탈리아 와인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제가 이탈리아에 출장 갔을 때, 가이드가 소몰리에를 준비하고 있는 유학생이었습니다. 그가 알려준 방법입니다. 처음에는 기준이 되는 와인을 정하고, 그것만 많이 마셔서 그 맛에 익숙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맛을 알겠다 싶으면 새로운 와인을 마시면서, 이 와인은 좀 더 달다, 좀 더 시다, 좀 더 텁텁하다, 같이 맛의 차이를 느껴가는 거죠. 그러다가 처음보다 더 입에 맞는 와인이 생기면 다시 그 와인을 기준으로 삼고 또 맛의 차이를 세분화 해 갑니다. 그러다보면 자신은 어떤 스타일의 와인을 좋아하는지 스스로 알게 되고 더 좋아하는 맛을 찾아 여행을 떠나게 되는 거죠.”

“정말 좋은 방법이네요. 그럼 부장님은 정말 좋아하는 와인을 찾으셨나요?”

“아닙니다. 저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찾으면 어떻게 하는데요?”

“줄창 그것만 마실 겁니다.”

“그러다 질리면요?”

“정말 좋아하면 질릴까요? 안 그럴 것 같은데요. 전.”     


와인과 제대로 만난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와인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아는 맛과 이름만 많아졌을 뿐. 

그러므로, 여행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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