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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Oct 08. 2019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장자(莊子)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코웃음 칠 게 분명하다. 요즘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정의란 기껏, 다수의 합의로 소수를 억압하는 명분에 불과하고, 더 간단히 말하면, 강자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장자 ‘거협’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9000명의 무리를 이끄는 도적 두목에게 그의 부하가 물었다.

“도둑에게도 도(道)가 있습니까?”

그러자 두목이 이렇게 답했다. 

“어디엔들 도(道)가 없겠느냐. 털만 한 집을 알아내는 것이 성(聖)이요, 가장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勇)이다. 어떤 물건이 가져올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빨리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지(知)다. 가장 늦게 나오는 것이 의(義)이고, 도적질이 끝난 후에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인(仁)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고 큰 도둑이 된 자는 아무도 없다.”


도둑으로서 도(道)와 정의(正義)에 이보다 나은 설명은 없을 듯하다. 다만 빠진 게 있다면 물건을 도둑맞은 사람의 고통이다. 이 고통만 빼면 도둑들 간의 정의는 완벽하게 실현됐다.     


이솝우화는 정의에 대해 좀 더 시니컬하게 말하고 있다. 

사자, 여우, 당나귀가 같이 사냥해서 잡은 고기를 놓고 사자가 물었다.

-당나귀가 고기를 먹는지에 대한 질문은 미뤄두자.

“어떻게 나누는 것이 좋을까?”

합리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당나귀가 말했다.

“공평하게 3등분으로 나누죠.”

이 말을 들은 사자는 그 자리에서 당나귀를 잡아먹고 다시 물었다. 

“자 이제 어떻게 나누는 게 공평하지?”

얍삽한 여우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전 뒷다리 하나만 주시면 땡큐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사자님 몫입니다.”

사자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이렇게 나누자는 거지?”

여우는 답했다.

“방금 당나귀의 운명에서 나누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이 우화에서 배울 것이 자신의 합리성을 주장하다가 사자 먹이로 전락한 당나귀의 태도인가, 여우의 얍삽한 지혜인가? 


확실한 것은 사자, 여우, 당나귀가 생각하는 정의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사자로서는 사냥감을 잡는데 공헌도로 보나 자신의 위명으로 보나 큰 밥통으로 보나 지가 많이 먹는 게 정의인데, 먹잇감(당나귀) 주제에 잡아먹지 않고 사냥에 끼워준 은덕도 모르고 3등분 하자고 주장한 당나귀는 죽어 마땅한 것이다.      


위 두 가지 경우보다 정의에 대해 뭔가 심도 있는 성찰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기대된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론’을 들여다보자. 

샌델 교수는 정의에 대해 3가지 접근법을 시도했다. 

첫째, 공리주의적인 관점.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다수의 이익이 소수의 이익보다 존중받아야 한다는 언뜻 보아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어떤 사안에 있어 어떤 것이 다수의 이익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여기서 다수란 전 세계 사람을 말하나, 사안에 관계된 사람만 말하나? 얼마나 관계돼야 관계됐다고 판단하나? 


-동물애호가들은 ‘다수’ 안에 동물도 넣고 싶어 할 것 같은데 동물은 무시해도 되나? 환경은? 지구상에 인간만 모두 행복하면 지구를 오염시켜도 정의인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심플한 정의에 비해 반박할 꺼리는 많아도 너무 많다.

다수가 깡패 같은 놈들이라면 그래도 다수의 이익이 존중받아야 하는가? 다수가 깡패인지 무지한 대중인지 선량한 국민인지 누가 어떻게 판단하나?


백번을 양보해 ‘정당한’ 다수의 이익을 존중한다고 할 때 소수의 이익은 무시해도 되나? 생존에 직결된다면 어쩔 것인가? 전염병 확산을 위해 감염이 의심되는 어린이를 버린다, 이런 경우, 어린이는 진정 이 땅에 정의가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


이런 이유 등등으로 공리주의적 관점은 정의란 무엇인가, 질문에 충분히 답하지 못한다. 

    

둘째, 자유 지상주의적 견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 상태가 정의라는 다소 위험한 주장이다. 자유로운 선택이 ‘비교적’ 선(善)으로 귀결되는 시스템이 경제이론이다. 이른바 시장주의, 규제 없는 시장에서 재화와 용역을 자유롭게 교환하게 두면 공정한 분배가 이뤄진다는 것인데, 이거 믿을 사람 거의 없다. 


사람을 자유롭게 놔두면 편법이 횡횡하고 개인의 능력과 특성 차이로 결국에는 심각한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배웠다. 남들보다 좀더 영리하거나 사악한 인간들은 자기 자유에만 관심 있고 남들의 자유는 쪼그라들거나 말거나 1도 관심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자유롭게 두면 절대 정의로워지지 않는 걸 보면 ‘정의’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거나 우리가 ‘정의’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것이 착각일 수도 있다.      


세 번째는 정의란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주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식의 접근은 뭔가 반박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실행하려고 해보면 너무 모호해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걸 누가 어떻게 책정하라고? 서로 제가 도덕적이라고 주장하는 마당에, 그 ‘도덕’이 뭐고 ‘정의’가 뭔지 얘기해보자는 건데 이런 식으로 말해버리면 동어반복이나 다름없다.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 저서에서 이 중 어느 것이 ‘정의’인지 딱 집어 얘기하지 않았다. -세 번째 정의에 좀 기울기는 했다. 


그럼 뭔가? 각자 알아서 고르라는 뜻인가? 자기 가치관에 맞게, 혹은 자기 삶의 방식에 유리한 것으로 기성복처럼 정의를 찾아 입으라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샌델 교수는 그만큼 ‘정의’를 정의하기가 어렵고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 진정한 ‘정의’에 대해 알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합의할 수 없다. 그런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개개인의 편차와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또 합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대등한 관계는 없으며,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성립된다.  -주변 관계를 꼼꼼히 따져보라. 친구라 할지라도 지배와 피지배 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가끔 역전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언어란 기본적으로 기호(기표)와 지시대상(기의)으로 이뤄져 있다. 학습을 통해 언어의 기본룰을 배우지만 각각의 언어 사용자가 인식하고 있는 지시대상의 의미는  100% 일치할 수 없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기호의 자의성'이라고 표현했다. 간단히 말해서 ‘엄마’라는 단어에 대해 100명에 대해 물으면 비슷하면서도, 100가지 다른 정의와 설명이 나온다. 


때문에 정의에 대해 토론할 때 우리는 서로의 말을 이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슴푸레 짐작만 할 뿐이다. 그렇다보니, 총론이나 대의에 합의하고서도 각론에 들어가면 서로의 의견이 애매하게 다르거나 첨예하게 갈린다. 일상에서 매일 쓰는 단어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따져보면 서로 다르게 언어를 사용하는데 ‘정의’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어떻게 합의한다는 말인가?


더욱이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정의, 과거나 현재, 미래에도 뜻이 변하지 않을 정의가 있을 리 없다.     

이렇게 정의란 상대적인 것이다, 라고 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기는커녕 더 신경질이 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네 편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들은 이 사실을 몰라서 그러는가? 그렇지 않다. 알고서도 그런다. 자기가 정의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스스로 정의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 주장은 빛을 잃는다. 특히 정의라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면 그 정의는 더 이상 정의가 아니게 된다. 


많이들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정의타령을 하지만 현대 사회는 ‘정의’라는 개념 없이도 잘 돌아갈 수 있다. 범죄자가 처벌 받는 것은 정의롭지 않아서 정의의 이름으로 처벌 받는 게 아니라, 공권력의 판단과 집행에 의해 권리가 박탈되고 사회에서 격리된다. -공권력의 옳고 그름은 따질 필요가 없다.


이긴 놈이 진 놈을 억압하는 것은 인간사회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이긴 놈이 스스로 정의라 떠들면서 진 놈에게 그것마저 인정하고 복창하라고 하는 건 너무 하지 않는가?      


차라리 이렇게 말하라. 내가 이겼으니 정의라고, 정의가 이긴다고 하지 말고. 그게 현실이고 받아들이기 편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외국 속담이 있다. 새는 새의 정의가 있고 벌레는 벌레의 정의가 있다.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고 해서 새의 정의를 벌레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일찍 일어난 새는 벌레를 잡지만, 일찍 일어난 벌레는 그 새에게 잡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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