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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Sep 27. 2019

자유의지는 없다. 진짜로.

살면서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할까? 무의미한 질문이다. 의자에서 일어나 오른쪽으로 일어날까 왼쪽으로 일어날까? 지하철에서 내릴 때 어느 발부터 내디딜까? 이런 작은 선택까지 합치면 하루에도 수백 번, 플레이리스트에 이 노래를 넣을까 저걸 넣을까 하는 마음속 갈등까지 친다면 수천 번, 죽을 때까지 셀 수도 없는 만큼 많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당신의 선택인가? 피치 못해 내리는 결정을 자신의 선택이라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하철에 앉아 나중에 타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대부분 사람이 왼발부터 지하철 바닥에 얹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심장의 위치 때문인데 심장이 ‘주로’ 왼쪽에 있기 때문에 인체가 안정감을 갖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왼쪽에 무게중심을 옮긴다고 한다. 즉 어느 발을 먼저 내딛든지 간에 그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이런 간단한 선택도 생리학적으로 따져보면 선택이 아닐 수 있다. 그 이전까지의 식사에 따른 영양소의 누적량을 두뇌가 계산하고 있고 자신에 맞는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다음 식사의 메뉴를 유도하는 호르몬을 분비한다. 

퇴근을 앞두고 마지막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당 땡긴다’고 하는 것도 비슷한 원리다. 그때 초코바를 하나 뜯어 먹으면서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면 당신의 두뇌가 비웃는다. 


진정한 선택은 어떤 것인가? 사안이 복잡하고 중요할수록 선택은 선택이 아닐 경우가 많다. 

포르투갈 여행을 앞두고 호텔을 고르는데 A호텔은 지리적으로 편하지만 조식이 포함되지 않고, B호텔은 핫플레이스와 거리는 좀 있어도 무료 조식은 물론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꼼꼼하게 생각해보니 호텔에서 있을 시간은 얼마 되지 않고 그저 잠만 편하게 잘 수 있으면 될 것 같아 A호텔을 고른다. 이것은 선택인가? 합리적 결정인가?


흔히 경제학을 선택의 학문이라고 한다. 경제학은 이것저것 꼼꼼하게 따져서 효용이 높은 것을 고르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경제학의 주체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이라고 가정한다. 

경제학자는 뭐든지 숫자로 바꾸고 모든 선택지의 확률과 보상치를 곱해 기댓값을 산출한다. 그리하여 가장 높은 것을 고르면 끝, 그런데도 그것을 선택이라 말하니 우습다. 

왜냐하면 계산하기 전에 내가 결과를 미리 알 수 없었다뿐인지, 어느 쪽이 기댓값이 높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계산만 잘한다면 내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정해져 있는 것을 따르는 것을 두고 선택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결혼이나 직장 문제에 접하면 선택은 훨씬 치밀해진다. 어느 남자냐, 어떤 회사냐, 그 이전에 결혼을 할 것인지, 회사를 다닐 것인지조차 선택의 대상이다. 누구나 경제학자는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확률과 보상을 수치화하는 건 어렵겠지만 나름의 산식으로 계산기를 두드린다. 그리고 어떤 게 나은지 판단이 서면 선택한다. 


그때는 성숙하지 않아, 혹은 판단이 미숙해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하자. 그게 자신의 선택일까? 그때는 주변의 환경과 모든 조건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돼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지 내 맘대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내 선택이고 내 잘못이라고 할 것인가?     

영화  <매트릭스2 -리로디드> 중

영화 <매트릭스2, 2003>를 보면 각성한 네오(키에누리브스)와 AI 예언자 오라클이 벤치가 있는 공원에서 조우하는 장면이 있다. 오라클은 언제나처럼 네오에게 사탕을 건네며 앉으라고 한다.

“캔디?”

“됐습니다.”

“진짜? 맛난데?”

처음에 사탕을 안 먹겠다며 버티던 네오는 오라클의 거듭된 권유를 못 이기고 결국 사탕을 받아 든다.

“내가 사탕을 받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죠?”

오라클은 뭐든지 다 맞추는 매트릭스 안의 예언자이니 네오가 사탕을 먹을 것이라는 쯤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응. 알았지.”

“다 정해져 있다는 거네요. 그러니까 오라클이 알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여기서 네오의 멋진 질문이 나온다. 

“그렇게 전부 다 결정돼 있다면 내가 선택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영화를 제작한 워쇼스키 형제(지금은 자매가 됐지만)는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관한 딜레마를 알고 이런 대사를 집어넣었던 것일까?  


인간의 운명은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돼 있고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은 치명적인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바로 선택과 자유의지의 문제다. 특히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운명이 있다는 게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운명으로 다 정해져 있는데 뭘 자유의지로 선택하라는 말인가? 선택하면 운명이 바뀌나? 바뀌는 게 어떻게 운명이야?

네오는 바로 이 같은 질문을 오라클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결정론적 세계관을 신봉하고 있다면, 개인의 선택은 없거나 무의미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내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책임질 필요도 없고 양심에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다. 

드라마 <도깨비> 중

드라마 <도깨비, 2016>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공유가 아무 것도 모르는 김고은을 데리고 자신의 비밀 안식처인 메밀밭에 데리고 나가 가슴에 박힌 도깨비 칼을 뽑아달라고 청한다. 김고은은 선물로 받은 명품가방을 크로스로 메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공유에게 마지막 할 말은 없냐고 묻는다. 그 칼을 뽑으면 공유는 무(無)로 돌아가 그 자리에서 없어질 테지만 김고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때 공유는 이렇게 말한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니 잘못이 아니다.”

그 날 칼이 안 뽑혔기에 망정이지 만약 칼이 덜컥 뽑혔다면 그 자리에서 공유는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김고은은 망연자실, 자책감에 완전히 무너졌을 것이다. 


핵심은 김고은이 칼을 뽑았다해도 그건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유는 김고은이 자책하지 말라는 뜻에서 미리 김고은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남겼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날이 좋다는 핑계로, 날이 흐리다는 핑계로, 이래저래 칼 뽑는 날짜를 미뤄왔던 공유 역시 가슴에 꽂힌 칼을 뽑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실제 <도깨비, 2016> 후반에 공유는 김고은의 손을 빌어 스스로 가슴에서 칼을 뽑고 숙적이었던 김병철을 벤다. 그리고 공유는 불꽃이 되어 사라지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김고은은 처절하게 통곡한다. 그녀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놓여진 결과는 고스란히 자기 몫이 되었다. 공유도 김고은을 구하기 위해서는 칼을 뽑을 수밖에 없었음에도 선택에 따르는 결과를 책임진다. 


인생은 정말 거지같다. 선택에 대한 결과를 책임지는 것도 모자라, 자기 선택이 아니었음에도 결과를 책임질 때가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영화 <매트릭스2> 의 메로빙지언

영화 <매트릭스2>의 AI 악당 메로빙지언은 자신을 찾아온 네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일반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영어로 Cause와 Result라고 하지만, 메로빙지언은 Cause and Consequence 라고 말한다. Result와 Consequence는 ‘결과’라는 뜻을 가진 비슷한 단어지만 미묘한 어감 차이가 있다. Result는 원인에 따른 직접적인 결과라는 뜻이지만, Consequence는 원인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때 쓰는 말이다. 즉, 흡연으로 폐암이 걸리면 그 폐암이 Consequence다. 때문에 Consequence는 선택에 대한 부정적인 ‘대가’를 의미한다.      


신은 잔인하게도 인간이 Consequence(부정적 결과)에 대해 자책하게끔 설계했다. 심지어 자신의 선택이 아닌데도 말이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 당시로 돌아가도 별 수가 없었을 것인데, 꼼꼼하게 따져 그래도 자기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끄집어내 스스로를 탓한다. -물론 양질의 인간에게만 해당된다. 어떤 인간은 분명히 제 잘못이 분명한데도 유체이탈 화법을 쓰며 아니라고 한다. 기억에서도 지우고 저만 편하게 사는 정신병자도 많다.     


그래서 <매트릭스3>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트리니티는 배신자의 손에 비참하게 죽고, 네오는 스미스 요원과 합체돼 산산이 부서지고 사라진다. 그리스적 인간이 선택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치르는 방식이다. 

     

고귀한 영혼은 스스로 선택에 따르는, 엄밀히 말하면 자기 선택이 아니다, 대가를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선택’을 한다. 

“제가 오늘 이 인간을 응징하고 지옥에 가겠습니다.”

이 정도가 아니라 훨씬 비참한 Consequence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선택한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2018>에 나오는 ‘의병’, 역사에 이름 석자 대신 ‘의병’이라는 두 글자만 새겨질 것을 알면서 아무 보상도 따르지 않는 의병의 길을 선택한다.      

따져보면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가족의 행복을 빼앗고, 몇몇 영웅의 이름 밑에 백골이 되어 묻힐 것인데 왜 그 길을 가는가? 그것은 선택인가? 운명인가?


차라리 선택이라면 그의 인생이 그토록 잔인하지는 않다. 하지만 선택으로 위장된 운명이라면, 신(神)은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닌가?      


<도깨비>의 공유의 말처럼, 신은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정도의 고통만을 준다고 할 때, 신은 우리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인간은 신이 짜 놓은 각본 속에서 살며, 선택이 아닌 것을 선택이라 믿고 그 결과에 자책하고 괴로워한다.      


정말 우리에게 자유의지란 없는 것일까? 신을 믿고 운명이 있다면, 선택은 정녕 무의미한 행위인가?  

네오와 오라클의 대화로 돌아가 보자. 다 정해져 있다면 선택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네오의 질문에 오라클은 이렇게 대답한다.

“선택은 이미 했고, 중요한 것은 그 이유를 아는 것이지.”

멋진 질문만큼 멋진 대답이다. 

네오는 오래전에 이미 선택했기 때문에 예언자 오라클은 그 결과를 알고 있다는 것, 다만 네오 스스로 자신이 뭘 선택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네오는 자신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하는 것이고, 그에 따른 대가, Consequence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을 오라클은 하고있는 것이다.      


중세 신학의 '자유의지 논란'도 이런 식으로 해소됐다. 인간은 나기 전부터 자유의지로 모든 중요한 사안을 선택했다. 인간은 무지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고, 전능한 하나님은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운명이 정해져 있으면서도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자유의지 딜레마를 절묘하게 빠져나갔다. 나는 이미 선택을 했지만 그것을 모를 뿐, 그래서 내 운명은 나의 것이다.      


운명을 믿으면 전부 내 잘못이 아닌 것 같아서 좋지만, 신의 꼭두각시로 사는 게 자존심 상한다. 하지만 위의 해결방식을 따르면 자유의지라는 자존심도 지키면서 잘못된 결과에 대해서는 현세의 내 잘못이 아니며 운명과 신을 탓할 수 있다. -내 영혼의 잘못일 가능성은 남는다.     


오늘도, 난 나의 자유의지를 시험해 보기 위해 파리바게트에 간다. 투명한 냉장보관함 속에 즐비하게 놓인 케이크를 고르며 생각한다. 

‘어느 케이크를 먹을지까지 미리 선택하지는 않았겠지?’


어쩌면 내게 남겨진 거의 유일한 선택이 이런 소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이 내 운명을 정한다면 그 바쁜 와중에 이런 세세한 것까지 정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내가 선택을 미리 했다고 해도 여러모로 미흡한 내 영혼이 생크림 케이크의 종류까지 정하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자유롭다. 그리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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