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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May 21. 2024

<오펜하이머>의 철학 "윤리가 과학에 앞선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셀던은 묻습니다.

 

"당신이 운전하는 버스가 폭주하여 멈출 수 없는데 왼편으로 가면 당신의 자식을 칠 것 같고, 오른편으로 가면 50명의 무고한 시민을 덮칠 것 같다. 어느 방향으로 핸들을 틀 것인가?"


사실 이 문제는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학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어느쪽이 '정의로운가' 물으면 답하기 힘들지만 어느쪽이 '윤리적인가' 물으면 비교적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럼 질문을 조금 바꿔 보겠습니다.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하지 않으면 10만 명의 미국병사가 희생되고, 투하하면 22만 명의 일본인이 죽습니다. 둘 중에 고른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고민할 것도 없이 '투하'를 선택했습니다. 훗날 역사가 어떻게 비난하든 당장은 자기 국민을 살린다는 명분이었죠.  이렇게 정치인에게 이 문제는 윤리적 문제도, 정의의 문제도 아닙니다. 


고민은 오펜하이머 같은 과학자들의 몫입니다. 그들이 원자폭탄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이런 가혹한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니까요. 


처음 원자폭탄을 개발할 당시에 오펜하이머의 관심은 '어디에 폭탄을 쓰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만들 수 있느냐'였습니다.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던 겁니다. 여기서 천재적 인간의 참을 수 없는 본성이 튀어나옵니다. 

할 수 있는 건 한다. 


해보기 전에는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고, 오펜하이머는 그것이 궁금합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도전을 선택했습니다. 


사실 우리보다 앞선 천재들의 이러한 도전 정신이 없었다면 지금쯤 인류 인구의 절반이상이 기아에 허덕이고 삼국시대와 유사한 일상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천재들의 발상과 도전정신을 무작정 비난하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원자폭탄이 개발됐을 때, 일군의 과학자들이 '정말 사용해도 되나?'라는 고민을 해보기도 전에 점화 스위치는 정치인에게 넘어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책임이라는 공은 타인에게 넘어간 것이죠. 


바로 이 지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잔혹하게 재현됩니다. 

과학자는 원자폭탄을 개발했을 뿐이고, 정치인은 투하를 결정했을 뿐이고, 군인은 명령에 따라 히로시마 상공 9000미터에서 3미터 크기의 대형폭탄을 떨어뜨렸을 뿐입니다. 


누구도 그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식에 희생될 필요없습니다. 전부 자기 잘못은 아니니까. 그럴 줄은 몰랐으니까.  


영화에서 오펜하이머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는 로스 앨러모스에서 원자폭탄의 테스트가 성공했을 때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남들이 모두 환호할 때 그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있었죠. 그건 '할 수 있느냐'란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결과로 바꾼 천재의 태도가 아닙니다. 

오펜하이머의 통제를 떠난 핵폭탄 개발기술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돼 수소폭탄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반대하면서도 연구는 계속했습니다. 


윤리적 고민은 없었다고 진술했지만 정말 고민이 없었다면 정부의 미운털이 박히면서까지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 시점에서 오펜하이머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할 수 있어도 하면 안되는 것이 있다' 


과학은 철학과 달리 뒤로 가는 법이 없습니다. 좌고우면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할 수 있나?' '어떻게?' 만 고민하며 앞으로 달려갑니다. 


유일한 제동장치가 있다면, 걸핏하면 '이거 맞나?' 고민하는 철학이라 하겠습니다. 


칸트의 윤리학에 따르면 도덕의 원칙이 되는 것은 형식원칙이며 그것은 정언명령으로 실현됩니다. 쉽게 말해 모든 감정적인 요소를 물리치고 할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할 것은 하지말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오펜하이머는 아이슈타인을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계산문제를 가지고 찾아갔을 때 우리 말했죠? 어쩌면 파멸의 연쇄반응이 시작될수 있다고."

"똑똑히 기억하죠. 그게 왜요?"

"시작된 것 같아서요."


이론적으로 구상했던 핵분열 반응의 연쇄반응이 실재 인류파멸의 연쇄반응이 될 수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천재성에 제동을 걸어줄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인류는 할 수 있는 것을 안하고 놔두지는 않았습니다. 실용과 이익 앞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경계는 모호하기 그지없죠.  


특히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한다'는 명분처럼, 내가 안 해도 다른 누군가가 어차피 할 거면 내가 먼저 하자는 게 낫다는 논리는 물리치기 버겁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영화 서막에 오펜하이머가 수면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응시하고 있는 장면을 통해 라비 박사가 오펜하이머에 대해 했던 말을 암시한 것 같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우리가 보는 세상 너머를 보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가 보았던 것이 실존이 존재에 앞서듯 윤리가 과학을 앞서야 한다는 믿음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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